로마는 왜 멸망했을까?
로마는 왜 멸망했을까?
  • 전병호 기자
  • 승인 2020.08.0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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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생단국대 교수
허구생 단국대 교수

(서울=파이낸셜리더스) 전병호 기자 =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위치한 ‘라티움’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비롯된 부족국가 하나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유역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로마는 그 영토가 남북으로는 지금의 잉글랜드에서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북단까지 2,600 킬로미터, 동서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코카서스 산맥까지 4,500 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들은 그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도시들을 잇는 촘촘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포장도로만 85,000 킬로미터였고, 비포장도로도 40,000 킬로미터에 달했다. 지금도 유럽의 오래 된 도시들을 거닐다 보면 자갈이 깊고 촘촘하게 박힌 로마 시대의 도로들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로마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영토의 크기나 도로망에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경제, 사회적 발전 단계에 따라 왕정, 공화정, 제정을 차례로 거쳤지만, 시대에 따라 왕, 집정관, 그리고 황제라는 이름으로 변모한 행정책임자,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원로원, 그리고 평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회가 권력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상호 견제하고 감독하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이루어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그의 《로마사 논고》에서 정치적 부패를 막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혼합정체(mixed government)가 바로 이를 말한 것이었으며, 그의 생각은 오늘날 삼권분립이라는 헌정제도의 이념적 뿌리가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보편성을 근간으로 한 로마의 법률은 여전히 세계 모든 국가의 법체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골격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들이 계승한 헬레니즘의 스토아철학은 기독교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로마도 멸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물론 동로마는 그 뒤로도 천년 가까운 생명을 이어나갔지만, 한때 세계사의 찬란한 빛이자 탁월한 동력이었던 로마는 서기 476년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사실상 몰락하였다.

이 위대한 나라 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로마 사람들이 사치와 향락에 젖어서 군대에 종사하기를 꺼려하게 되면서 돈으로 사온 이민족 용병들에게 국방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자초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한 라틴어가 워낙 배우기 어려운 언어라서 광대한 제국의 전체 인민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 때문에 제국 인민 전체가 공유하는 관심사나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만큼 인민들의 결속이나 유대가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경제적 분석들도 있다. 이를테면, 4세기 들어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빵과 서커스’, 즉, 식량과 구경거리를 제공하느라 극심한 재정적자에 허덕이게 됐는데, 로마 정부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불량화폐를 주조했다(debasement)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폐 주조에 들어가는 금은의 함량을 낮추고 그 대신에 구리 등 값싼 금속을 섞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통화량이 늘어나면서 가격수준은 올라가고 통화가치는 떨어진다는 피셔(Irving Fisher)의 총통화론(MV=PT)이 적용되게 된다. 실제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뒤따랐다. 이에 군인 출신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물가 동결을 명령하고 어기면 사형에 처하는 등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경제논리를 역행하는 이 조치가 통할 리가 만무했고, 로마를 지탱해 왔던 화폐경제가 붕괴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통하는 설명이라 하겠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그것은 ‘노예제도’에 있었다.

오늘의 잣대에서 보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하거나 물건처럼 사고판다는 것은 인간성에 반하는 것이고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는 일이다. 그러나 타인의 노동력 착취를 본질로 하는 노예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당연한 일처럼 인식되고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제도로서 존속되어 왔다. 만약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세계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발명품의 하나로 칭송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테네 전성기 전체 인구의 30에서 50 퍼센트는 노예들이었다. 이들이 대부분의 생산 활동을 도맡아 주었기에 이른바 ‘민주적 시민’들이 시간 소비적인 직접민주주의라는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은 기원전 2세기 이후의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곳곳에 남아있는 로마제국의 유적 중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름다운 타일로 치장된 목욕탕 시설이다. 로마인들의 목욕탕 사랑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이 조금은 사치스러운 문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상수도와 하수도 처리기술 덕분이었다. 특히 배수(排水) 처리 기술이 없었다면 위생상의 문제로 인해 그 운영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로마인들이 배수(drain)는 잘했지만 두뇌(brain)는 없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당시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강력하고 부강한 국가를 이루었던 로마인들의 머리가 나빴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걸까? 이는 로마인들이 정작 인류 역사에서 의미 있는 기술혁신이나 생산성 향상을 이루지 못했음을 비꼰 것으로서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러한 혁신은 모두 중세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심경(深耕)쟁기, 삼포제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미개인으로 여겼던 게르만인들도 할 수 있었던 일을 해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2세기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거침없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고, 정복지의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 로마군의 행렬 뒤에는 늘 노예상인들이 따라다녔고, 군인들은 승전의 대가로 받은 노예들을 노예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이제 로마도 옛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노예들이 생산을 전담하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건설된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는 이름의 광대한 대농장들도 노예가 없었으면 경영이 불가능했다. 이후 수백 년에 걸친 로마 전성기에 걸쳐 노예들의 공급은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로마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부유층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자유농들은 소작인이 되었고 그들 중 다수는 도시빈민이 되었다. 결국, 로마의 모든 생산은 노예들에게 맡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마가 팽창할 대로 팽창한 2세기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정복을 통한 노예 획득이 어려워졌다.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당시 기술수준으로 볼 때 무용지물인 아프리카 사막지대에 이르렀다. 또한 북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와 라인 강 동쪽에 살고 있는  이민족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의 사산왕조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예 공급이 감소되면서 로마의 토지는 황폐화되고 농업생산력은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다. 농촌 경제의 전반적인 쇠퇴는 도시 경제까지 마비시켰다. 귀족들이 도시를 떠나 지방의 정원으로 이주함에 따라 도시는 회생이 어려운 늪에 빠졌다. 이러한 로마가 앞으로 닥쳐올 시련을 이겨낼 힘이 없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 서양 고대와 우리 노비의 차이점이다.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우리 노비와 달리 서양 고대의 노예들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와 같은 노예의 재생산이 난국을 타개할 방책이 될 수도 있었을 법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돈이 많이 들고 과거와 같은 노동 강도를 유지할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세상사 모든 것에는 명과 암이 같이 있다.

허구생 교수는
서강대를 졸업했으며,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영국빈민법에 관한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람들과 더불어 역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중적인 글쓰기와 강의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국경제》에 실었던 〈경제사 다시보기〉와 〈다산칼럼〉, 《세리시이오》에서 진행했던 동영상강의 〈라이벌의 역사〉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저서로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 《울퉁불퉁한 우리의근대》, 《근대 초기의 영국》 등이 있다.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을 거쳐 현재 단국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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