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北關大捷)
북관대첩(北關大捷)
  • 전병호 기자
  • 승인 2020.05.1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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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셜리더스) 전병호 기자 = 임진왜란 때 3대첩으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을 드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4대첩으로 충의공 정문부장군의 북관대첩을 넣기도 한다.

일본 학자들중에는 3대첩으로 진주대첩은 빼고 한산대첩, 행주대첩, 북관대첩을 넣기도 한다. 이만큼의 비중이 있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정문부 장군과 함께 거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북관대첩이란 한마디로 오늘날의 함경도 지방에서 1592년 9월부터 1593년 1월까지 정문부장군을 중심으로 함경도 의병들이 가토기요마사의 일본 최정예 육군을 물리친 승리의 역사기록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은 20여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두 달도 안되어 개성과 평양마저 빼앗고 1592년 6월 함경도 관내로 진입하여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일대를 남에서 북으로 주요 거점을 확보하여 함경도를 본격적으로 점령 통치하였다.

“왜장 가토기요마사가 북쪽으로 침입하니 회령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여러 대신을 붙잡고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 남,북도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고 선조 수정실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함경도 지역 사람들은 조선 초기 이래 차별대우로 등용의 길이 막히고 함경도지역 출신 중앙관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 지역적 불만이 쌓여 있던차에 일본군이 진입하자 국경인 국세필등이 반란을 일으켜 근왕병 모집으로 함경도에 들어와 있던 임해군, 순화군과 여러 대신들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갖다 바치는 일이 있었다. 이에 가토기요마사는 이들에게 관직을 주고 대리로 함경도를 통치하게 했다.
 
1592년 7월 함경도 관내는 조선의 모든 통치체제가 무너저 관리들은 도망가거나 잠적하고 가토기요마사의 일본군이 완전 장악하여 본격적으로 통치하는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피신해 있던 함경도 정문부 북평사(정6품)에게로 경성선비 이붕수와 최배천, 지달원등이 찾아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집하니 강문우 등이 합류하고 종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등 피신해 있던 조선의 관리와 관군들도 모여들어 의병을 조직하게 되었다.

9월에 여진족 방비 명분으로 경성으로 들어가 반란군인 국세필을 처단하고 회령의 반란군을 평정하여 국경인과 정말수등을 처단하여 함경도 반란세력을 완전 평정하고 6진도 회복하였다.
 
10월에 들어 길주 외곽을 약탈하던 일본군을 장평에서 기습하여 수백명을 참수시키고 일본군을 길주성에 고립시켰다. 길주성 고립을 풀기 위해 온 가토기요마사의 지원군을 쌍포에서 격퇴시켜 길주성 탈출시도를 좌절시켰다.

1593년 1월에는 길주 남쪽 단천에서 기병 이백으로 수백의 일본군을 죽였다.

가토기요마사가 길주에 고립된 일본군을 구하기 위해 주력군을 동원해서 대대적으로 마천령을 넘어 왔으나, 공의 삼천 의병은 임명에서 매복, 백탑교에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아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명천으로 물러나 군을 재정비하는 사이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략 및 수복하면서 일본군이 남쪽으로 밀려나자 가토기요마사는 함경도에서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철군을 결심하고 길주 일본군과 만나 곧바로 후퇴하게 된다. 이로써 함경도지역은 완전 수복하게 된다.

가토기요마사의 군대는 의병들과의 전투와 가혹한 함경도의 겨울날씨에 따른 동사와 탈진. 아사자가 속출하여 팔천이상 몰살 되었다.

정문부 장군은 정6품에 불과한 관리에 불과 하였으나, 그 당시 관군이 흩어진 상황에서 가토기요마사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애국충정으로 뭉친 의병들이 필요했고 의병들을 조직한 다음 당시 관등(정현룡 정3품))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참여하여 정문부장군의 뛰어난 지도력이 의병장으로서 유감없이 발휘하여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북관대첩의 승리 요인으로는
첫째, 장군의 충의와 남다른 지략과 함경도 의병들의 용맹함
둘째, 함경도의 험난한 지형과 가혹한 겨울
셋째, 때마침 들려온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수복소식으로 일본군의 전의상실을 들 수 있겠다.

북관대첩은 1개성을 지켜낸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도전체를 적과의 전투을 통해 승리하여 수복에 성공하고 함경도에서 평안도 의주를 향하여 선조와 조정을 위협할 세력을 막아낸 것으로 조선을 지키는 데 상당한 공헌을 한 것으로 임진왜란의 다른 3대첩에 비추어도 부족이 없는 것이다.

3천명도 안되는 함경도의병들이 2만 2천여명의 가토기요마사의 일본 정예군을 물리친 전투이고 조선의 선비가 일본의 사무라이를 이긴 전투다 .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함경도 감사 윤탁연이 공의 공적에 대한 시기심으로 반대로 조정에 보고 되고  선조의 의병장군들의 공훈 무시로 임란후에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난 숙종 때 이르러 함경도 북평사 최창대에 의해서 장군과 의병들의 업적을 기린 1500자의 비문을 가진 “북관대첩비”가 1709년에 오늘날 북한의 김책시인 길주에 세워지게 된다.

함경도에서 용맹과 지략으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내용을 글로 설명해 놓은 <북관유적도첩>이란 역사고사 화첩에 <창의토왜도>란 제목으로 정문부장군의 활약상이 글과 그림으로 남아 있다.

누각 가운데가 정문부장군이고 국세필 일당을 참수하고 왜병을 쫓는 의병들의 활약을 나타내고 있다.

(글쓴이 = 정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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