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역경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 이은서 기자
  • 승인 2020.10.19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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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율(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의 창업 스토리
(사진) =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이승율'님
(사진) =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이승율'님

 

#1

 이산화력발전소 준공대비공사를 수행하면서 가장 부족하고 힘들었던 부분이 '' 문제였다.

 선금금을 일부 받아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 후 일을 공정에 맞춰 잘 추진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비축되어 있거나 아니면 조달 능력이 있어서 그때그때 자재 구매와 인건비 지출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내가 제일 못한 게 그 부분이다. 거의 맨몸으로 시작한 일이 되다 보니 늘 자금에 쪼들리고 궁했다. 집사람이 구해오는 ''으로 공사를 추친 하면서 매월 말 기성이 나오면 이를 갚아주고 또 빌려오는 형국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의 일은 박수현 소장 팀이 잘 해주어서 아무 탈 없이 진척되고 있었지만, 사업자 처지에서 이들을 뒷받침하는 데는 무엇보다 ''문제가 제일 중요한 관건이고 골칫덩어리였다. 어찌 보면 ''이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소원처럼 집삭람에게 되뇐 말이 '우리 돈 벌면 집을 한 채 지어서 그걸 은행에 담보해 놓고 융자받아서 일해 봅시다.' 매월 빚쟁이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었으므로 '은행 돈'을 이용해서 마음 편히 사업하는 게 큰 소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만한 기회가 왔다. 3월 중순부터 시작한 이산화력발전소 공사가 여름을 지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을 때다.

 양재동 은광여고 후문 앞에, 예전에 장모께서 동생(막내 이모)를 위해 장만해준 조그만 집터(30평 정도 되는 땅)가 있었다. 처 이모부가 그걸 우리에게 팔겠다고 해서 인수하게 되었고 그런 참에 그 옆에 있는 40평쯤 되는 땅도 사들여 상가주택(1: 가게2, 2~3: 주택) 형태로 신축하기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땅 매입비와 건축비용은 그동안 6개월 공사를 하면서 번 돈과 은행 융자금 및 세입자 전세금으로 어느정도 충당할만했다.

 건축 공사를 맡아줄 현장 팀은, 그 당시 우연히 만났지만 대치동에서 집 장사를 하고 있다는 집사람의 중학교 동창되는 분(A)이 추천한 일꾼들로 정했다.

 9월 초에 건축허가를 받고 그다음 주에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터파기를 해 놓고 기초 콘크리트 작업을 마쳤던 날 밤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왔다. 두 내외가 사무실(영동시장 앞)에서 늦게까지 일한 후 집(역삼동 전셋집)으로 퇴근하려다가 현장이 걱정되어 양재동으로 가 보기로 했다. 밤중인 데다 비가 많이 오고 있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길가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 합승을 하게 됐는데, 뒷자리에 남자분이 타고 있어서 내가 뒷좌석에 타고 집사람은 앞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양재동 족으로 가는 도중에 뒷좌석 승객을 무지개아파트에 내려 준 다음, (집사람은 원래 앉아 있던 조수석에 그냥 앉아 있었고) 나만 잠시 차에서 내렸다가 도로 뒷자리에 앉아 양재동 현장으로 갔다. 은광여고 후문 쪽 길은 언덕배기 지형이다. 현장 부지도 언덕배기에 연하여 있어서 경사지 부분을 먼저 굴착한 다음 건물 기초를 앉혀야 하는 그런 지형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너무 많이 왔기에 터파기 한 후 기초 콘크리트 작업을 해 놓은 곳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염려가 되어 달려간 것이다. 그날 밤(1979.9.14) 우리 내외에게 큰 불행이 닥쳤다.

 우산을 든 채로 현장 이곳저곳을 살펴본 다음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택시(뒷자리)를 타고 양재동에서 역삼동 쪽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사람은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길은 역삼동 쪽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 당시 영동대로 길 양쪽에는 버스 노선을 위한 분리대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11시경 어두운 밤길이었다. 비가 집중호우처럼 쏟아져서 택시 기사가 그 분리대 화단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리막길이고 차도 없으니 속도를 좀 냈던가 보다. 경찰 진술에서 기사가 70km를 달렸다고 했지만 최소한 80km 이상 달렸을 것이다.

 택시는 분리대를 들이받고 도로변으로 튕겨 나가다가 가로수에 걸려 급정거를 한 상태가 됐다. 천만다행으로 사고 지점 바로 옆 도로변에 정형외과 병원에 있었다. 택시 기사와 나는 꼬구라져 있는 집사람을 끌어내 등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차체 앞 범퍼에 얼굴을 부딪쳐 얼굴을 크게 다친 집사람은 그날 밤 입 주변에 8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빨도 4개나 부러지고 경추(목등뼈)도 크게 손상을 입은 중상이었다. 나는 뒷자리에 있다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알 수 없지만) 앞이마가 찢어지고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아! 그런데 지금껏 생각해도, 그때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얼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사람을 응급조치해 주셨던 그 의사 선생님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외과 의사라고 평하고 싶다. 80바늘을 꿰매는 과정이 찢어진 입술과 입 주위 피부조직을 어떻게나 정미랗게 잘 다지고 맞춰 주었던지, 그 후 1년쯤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보니 코밑에 약간 희미하게 표가 날 정도이지 남이 보면 전혀 모를 정도로 수술 자국이 깔끔했다. 그나마 얼마나 큰 다행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가지 않아도 될 공사 현장을 구태여 다녀오다가 큰 사고를 낸 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불행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통사고 난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집사람 곁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장모님이 병실로 들어오셨다

 얼굴과 머리통 전체를 칭칭 감고 있는 딸자식을 내려다 보시며 한참을 울고 나시더니 내게 불쑥 흰 종이 하나를 내밀어 보이셨다

 이게 웬일인가! 멀고 먼 일본 땅에 계시는 장인어른(재일 교포)께서 지난 밤에, 그것도 우리가 사고 난 그 비슷한 시간에 심장마비로 운명하셨다는 전보 쪽지였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장모님을 뭐라고 위로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울기만 했다. 그 당시 우리 내외는 일 때문에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해서 시골에 혼자 계시는 장모님더러 서울에 올라오셔서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드려 역삼동 전셋집에서 함께 모시고 있었다. ! 그런데 어쩌다 이런 불행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단 말인가!

 한마디로 미칠 지경이 되었다. 어떤 검은 함정인생의 험악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2

 사고 난 다음 날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한 후 석 달 가까이 집사람과 같이 한 병실에서 지내다가 12월 초순 무렵 퇴원했다.

 그동안 회사 직원들 십여 명 인원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거리는 전혀 없었다. 이전부터 몇 가지 사업 건을 추친해 왔으나 회사 대표 내외가 장기간 입원하게 되자 협의해 왔던 모든 일이 중단 되거나 다른 회사로 돌려졌다.

 이산화력발전소 일은 박수현 소장이 잘 마무리해서 10월 중순에 무난히 준공검사를 마쳤다. 그러나 참으로 암담한 일이 발생했다. 12월 초 퇴원하는 대로 바로 양재동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봤다.

 공사는 건물 뼈대만 세워져 있고 아직 지붕 상량도 올리지 않은 상태로 중단되어 있었다. 현장에는 집 지키는 노인 한 사람만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현장 소장이 어디 갔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실은 우리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공사를 중단하려고도 생각했으나, 이미 벌려 놓은 일이고 또 집사람 동창생 되는 분(A)이 자기가 책임지고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니 그를 믿고 은행 통장까지 맡기게 되었다.

 그런데 석 달 후 퇴원하고 나와보니 이 모양이었다. 겨우 수소문하여 A를 찾아가 만났더니 도리어 우리를 보고 통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대치동에서 집을 몇 채 동시에 발주하여 공사를 하다 보니 지금 사정이 나빠져 우리 돈까지 쓰게 되었다. 부득이 이번 겨울 지나고 봄에 집을 완성해 주겠으니 좀 참아 달라. 그리고 역삼동 전세 기한이 지나서 어디 갈 데가 없으면 자기 집에 와서 한 두 달 있는 동안에 다른 전셋집을 얻어 주겠노라고 했다.

 아이고! 참으로 암담했다. 그동안 아이들(2)을 돌봐주신 장모님을 시골로 내려가시게 하고 우리 네 식구는 할 수 없이 A의 집에 보름 정도 머물러 있다가 나중에 역삼동 방 한 칸(지하실 방) 월세 집을 얻어 나가서 그 혹독한 겨울, 참담하고 불행한 겨울을 지냈다.

 

 봄(3)이 되었으나 A는 치일피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을 계속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 직원을 반으로 줄이고 아산화력발전소 준공 이후에 받은 공사 잔금으로 겨우겨우 회사를 운영했다.

 어떤 이는, 특히 친가 부모님은 회사를 치우고 어디 취직이나 하라고 야단치듯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때 우리 내외는 결심했다. 죽어도 회사 문은 닫지 않겠다고!  더구나 아내의 전공을 살려보겠다고 세운 회사가 아닌가!  또한, 늦깎이 학생이지만 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인생의 진실을 찾고 세상 속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 보겠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내가 아닌가!

 

 이 정도 고난과 역경이 있다고 해서 회사 문을 닫고 물러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게임'에서 영원히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굶어도 결코 회사 문은 닫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지키며 우리 두 내외는 다시 한번 창업한다는 마음으로 봄의 아지랑이 피는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4월 중순부터 건축 공사를 재개했다. 모든 일을 직영으로 처리했다. 공사비는 우리가 오히려 통사정하여 A로부터 받아낸 일부 현금과 명동에서 복덕방 하는 영감님의 알선으로 사채를 쓰기로 했다. 일꾼들은 박수현 소장이 소개해준 인부들을 공사종류별로 맡겨서 시켰다.

 처음 지어 보는 집이지만 그런대로 무난히 잘 지었다. 다만 공사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공기가 5개월이나 걸렸다.

 9월 말에 입주한 다음, 집에 살면서 매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은광여고 후문 쪽 언덕배기라서 위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집이 팔리지 않아 결국 겨울을 신축 주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다음 해(1981) 1월 초에 셋째 아이(현주)를 낳았다. 나는 한전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아산화력발전소 턴 키방식으로 삼천포 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 설계업무에 주력했고, 집사람은 봄 시즌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원공사뿐만 아니라 농장 조성이라던가 시내 빌딩에 나무 몇 주 심어주는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맡아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복리 이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일 년 정도 살면서 집을 팔아보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10월 말에 사채권자에게 집을 통째로 넘겨주고 나왔다. 그러고 나서 거쳐를 옮긴 데가 역삼동 연립주택단지 사이의 공터에 10평 규모로 지은 비닐하우스였다. 난생처음으로 비닐하우스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참담한 상태에서도 우리 내외는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엘리트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결코 망해서는 안된다.’라는 사명적 자존심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신 분들과의 관계가 너무나 소중했다. 집사람의 교회교우들은 물론이고 사업과 사회활동을 통해 만난 분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주신 몇 분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그 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이나 명예보다 더 소중한 사회적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또한, 고생해서 지은 집이지만 부채 청산용으로 털고 나니 돈에 매여 안달하던 마음이 많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비닐하우스 생활을 택했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빚지고 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기왕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유능한 사업가가 되어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선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밑바닥에서 벽공을 바라보며 심기일전하여 새 삶을 살아 보자는 결단이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는 역설적인 계기가 되었다. 설사 그것이 시지프의 고통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고달팠다. 이년 기한으로 세를 얻은 300평 공터의 전면도로 쪽에 수목 전시장 형태로 상록수를 잔뜩 심어 놓고 그 나무들 사이로 샛길을 만들었다. 비닐하우스에 이르는 진입로였다.

 뒤편 빈 땅의 한쪽 편에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전기와 수도는 담장 너머 옆집(태화연립주택)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그리고 화장실은 유원지에서 쓰는 간이화장실 한 세트를 구해서 설치했다. 비닐하우스 안에 2평 되는 부엌을 칸막이로 막아 놓고 연탄 아궁이를 만들어 솔을 걸었다. 방바닥은 흙을 돋우어 온돌형으로 난방을 했으며 시멘트 바닥으로 마감한 후 그 위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그렇게 해서 여섯 명이 한방에 자면서 겨울을 지냈다. 우리 내외와 아이들 세 명, 그리고 또 한 명은 아내가 무남독녀라서 외롭다고 장모님이 오래전에 세 살짜리 여식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는데, 그동안 대구에 있다가 장모님이 대신에 갓난아이(막내딸)를 돌보려고 올라온 처제(당시14). 슬프지만 참으로 특수한 실험적 인간조건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더는 내려 갈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의 실존적 진면목을 체험하는 긴박감이 몸서리치게 침습해왔다.

 

#3

 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55일 어린이날이었다. 아내는 봄철 공사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맡아 놓은 일감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처제와 함께 아이들 셋을 데리고 뚝섬유원지로 놀러 갔다. 어린이날이라 이날 만큼은 특별히 아이들에게 부모 구실을 잘 해 주고 싶어서다. 수양버들 숲이 우거져 있는 공터에 어린이 놀이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간식과 마실 음료를 사준 다음 자기들끼리 놀아라 해놓고 나는 물가로 갔다. 물가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물결 위에 햇빛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반쯤 감은 눈의 망막 위로 지난 세월에 겪은 여러 가지 사연들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되새겨진다.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가 연상되었다.

 책에 보면, 강변에서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며 수많은 살마의 얼굴로 윤회해온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도 그와 같아서 수많은 사연의 얼굴이 윤회하며 현재의 나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이 혹독한 인연을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술김에?)불같이 일어났다.

 빈 소주병의 목을 쥐고 물가에 있는 돌멩이를 내리쳤다. 그러고는 깨진 병을 움켜쥐고 왼쪽 팔목을 찔렀다. 겁이 나서 깊이 찌르진 못했다. 그러나 깨진 병을 옆으로 긋기만 해도 정맥을 끊기는 충분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참(1분 정도?)을 바둥대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어린아이 소리가 들려왔다.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니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막내딸(2)이 땅에 엎어져 있고 (처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놀던 아이와 부딪쳐 넘어진 것 같았다), 아들 둘(9, 6)이 그네를 타고 놀다가 동생이 넘어져 있는 곳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덩달아 튕긴 듯 일어나 달려갔다. 깨진 병을 그냥 물가에 집어던진 채로... 흙 묻은 얼굴로 울고 있는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이 어린 것을 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가라는 생각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새 화장실에 다녀온 처제에게 집에 갈 준비를 하라일러 놓고 나는 다시 아까 앉아 있었던 물가로 갔다. 깨진 병을 주워 모았다. 손에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렀다. 영혼의 핏 물 같은 슬픔과 회한이 뼛속 깊이 흘러들었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깨진 병 조각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후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1982넌 어린이날 행사(?)였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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