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죽음의 미학
가치 있는 죽음의 미학
  • 전병호 기자
  • 승인 2020.12.0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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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파이낸셜리더스) 전병호 기자 

(사진) = 이승율 동북아단체 사장
(사진)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1.
하루 사이에 두 분 저명인사들의 죽음을 접하고 나니 마음이 무척 심란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이 났다.
한 분은 60대 중반으로 서울시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차기 대권 후보권에 랭크되어 있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은 6·25전쟁 영웅으로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사표로 추앙받아 오신 분이다. 한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한 분은 자연수명을 사시다가 그저께 (7/10) 100세로 운명하셨다. 한 분은 자기가 데리고 있던 비서로부터 성추행 고소를 당한 지 하루 만에 홀로 이승을 떠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자신의 명을 충분히 인지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으신 분이다.  

인간의 삶의 유형도 지역과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죽음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갖가지 의미로 후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역사적으로 인류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 '위대한 죽음'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독배를 마심으로써 자기성찰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훈계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도 마지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까지 장수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다함으로써 임진왜란의 대미를 완벽한 승리로 끝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성웅(聖雄)이라 부른다.  이처럼 범인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위대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개죽음이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는 죽음들도 많이 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사가 깊어지는 가운데, 한 사람의 죽음이 결코 개인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집안이나 사회 후대들에 어떤 형태로든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돌아보며 '가치 있는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라는 깊은 경각심이 생긴다.

#2.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죽음이 될까? 그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게 더 좋겠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적으로나 또는 우리 주변에서 귀감이 되는 죽음이 누구일까?
 
우선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에 대해 카테고리를 열거해 보자. 자신의 허물을 덮거나,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가족을 위해서/친구나 이웃을 위해서/사랑을 위해서/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교회를 위해서/전장에서 아군의 승리를 위해서/인류의 정의를 위해서…….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수많은 경우가 있지만 크게 분류하여 소의와 대의 즉 사적 의미의 죽음과 공의를 위해 죽는 경우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적 의미로서의 죽음은 그 경우가 너무 막연하고 또 의미 자체가 없는 것 같아서 이런 경우는 도외시하는 게 좋겠다. 결국, 공적인 의미에서 대의를 위해 '가치 있는 죽음'으로 생을 마친 경우를 살펴보는 게 더 의미가 있겠다 싶다.  

그럼 공의를 위해서 죽음을 맞이한 경우, 과연 어떻게 죽는 게 '가치 있는 죽음'이 될까?
우선 죽음의 양태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겠다.
자진/자결 등 공의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자살이 있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옥고를 치르다 병사 또는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한 경우처럼  공의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타살이 있다. 그 외 일반적으로 공의를 지키며 산다고 해도 병으로 죽든지 사고나 노화 현상으로 자연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듯 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를 뛰어넘어 천수를 누리며 공의를 다해 삶을 값지게 살다가 떠난 복된 죽음도 있다.  

#3.
먼저 자살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즉 공의를 위해 자진/자결한 죽음이 있다. 사적 이유와 스트레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 아니라, 조선조 말 민영환의 경우처럼 나라 잃은 슬픔을 죽음으로 대신한 경우다.
 
다음은 타의에 의한 죽음이다. 자유가 박탈된 엄혹한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공의를 지키다 순절한 의인들이 적지 않다.
안중근 의사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사형 집행이라는 점에서 법적인 타살의 대표적 순절이다. 이런 경우의 죽음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자진의 경우와 같이 한 시대를 대변하는 고결한 인격과 애국의 지표가 되면서, 불사조와 같은 의인의 행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자연사다. 공의를 다하여 살던 그렇지 못하든 간에 우리는 모두 죽기 마련이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부른다.
어떤 경우이든 그 죽음을 회피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가능하면 자신의 과거 행적을 후회하거나 비하하는 일 없이 '인생 끝내기'를 잘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든 짧든 지금까지 한 인간으로서 개체적 일생을 살아왔으니 세상을 하직하면서 자식들에게 그동안 너희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왔다는 위로와 감사의 말 한마디 정도는 남기고 떠났으면 좋겠다. 이것이 평범하면서도 인간에게 남겨진 보편적인 가치로서의 진솔한 삶의 마감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가운데서 특별한 경우로, 인간에게 주어진 천수를 다 누리면서도 그 인생 전체를 공의를 위해 헌신하고 세상을 위해 유익을 끼치고 가는 삶이 있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복되고 값진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저께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백선엽 장군이 바로 그런 삶의 대표적 사표다. 그래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이 남기신 우국충정의 뜻(한미동맹과 국가안보)과 '천명(天命)의 도'를 살피며 마음을 다해 명복을 빌고자 한다.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앞에서 '가치 있는 죽음'에 대한 각성이 샘물처럼 솟아나 가슴을 적신다.
만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죽어도 죽지 않는 호국의 영령'으로 우리를 통일의 그 날까지 보살펴 주시기를 삼가 빌고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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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업 스토리> ② 역경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1.
아산화력발전소 준공대비공사를 수행하면서 가장 부족하고 힘들었던 부분이 '돈' 문제였다.
선급금을 일부 받아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 후 일을 공정에 맞춰 잘 추진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비축되어 있거나 아니면 조달 능력이 있어서 그때그때 자재 구매와 인건비 지출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내가 제일 못한 게 그 부분이다. 거의 맨몸으로 시작한 일이 되다 보니 늘 자금에 쪼들리고 궁했다. 집사람이 구해오는 '빚'으로 공사를 추진 하면서 매월 말 기성이 나오면 이를 갚아주고 또 빌려오는 형국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의 일은 박수현 소장 팀이 잘 해 주어서 아무 탈 없이 진척되고 있었지만, 사업자 처지에서 이들을 뒷받침하는 데는 무엇보다 '돈' 문제가 제일 중요한 관건이고 골칫덩어리였다. 어찌 보면 '돈'이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소원처럼 집사람에게 되뇐 말이 '우리 돈 벌면 집을 한 채 지어서 그걸 은행에 담보해 놓고 융자받아서 일해 봅시다.' 매월 빚쟁이 눈치 보느라 여념이 없었으므로 '은행 돈'을 이용해서 마음 편히 사업하는 게 큰 소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만한 기회가 왔다. 3월 중순부터 시작한 아산화력발전소 공사가 여름을 지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을 때다.
양재동 은광여고 후문 앞에, 예전에 장모께서 동생(막내 이모)을 위해 장만해준 조그만 집터(30평 정도 되는 땅)가 있었다. 처 이모부가 그걸 우리에게 팔겠다고 해서 인수하게 되었고 그런 참에 그 옆에 있는 40평쯤 되는 땅도 사들여 상가주택(1층: 가게 2칸, 2~3층: 주택) 형태로 신축하기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땅 매입비와 건축비용은 그동안 6개월 공사를 하면서 번 돈과 은행 융자금 및 세입자 전세금으로 어느 정도 충당할만했다.
건축 공사를 맡아줄 현장 팀은, 그 당시 우연히 만났지만 대치동에서 집 장사를 하고 있다는 집사람의 중학교 동창되는 분(A)이 추천한 일꾼들로 정했다.  

9월 초에 건축허가를 받고 그다음 주에 바로 공사를 시작했다. 터파기를 해 놓고 기초 콘크리트 작업을 마쳤던 날 밤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왔다. 두 내외가 사무실(영동시장 앞)에서 늦게까지 일한 후 집(역삼동 전셋집)으로 퇴근하려다가 현장이 걱정되어 양재동으로 가 보기로 했다. 밤중인 데다 비가 많이 오고 있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길가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 합승을 하게 됐는데, 뒷자리에 남자분이 타고 있어서 내가 뒷좌석에 타고 집사람은 앞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양재동 쪽으로 가는 도중에 뒷좌석 승객을 무지개아파트에 내려 준 다음, (집사람은 원래 앉아 있던 조수석에 그냥 앉아 있었고) 나만 잠시 차에서 내렸다가 도로 뒷자리에 앉아 양재동 현장으로 갔다. 은광여고 후문 쪽 길은  언덕배기 지형이다. 현장 부지도 언덕배기에 연하여 있어서 경사지 부분을 먼저 굴착한 다음 건물 기초를 앉혀야 하는 그런 지형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너무 많이 왔기에 터파기 한 후 기초 콘크리트 작업을 해 놓은 곳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염려가 되어 달려간 것이다. 그날 밤(1979.9.14) 우리 내외에게 큰 불행이 닥쳤다.  

우산을 든 채로 현장 이곳저곳을  살펴본 다음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택시(뒷자리)를 타고  양재동에서 역삼동 쪽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사람은 여전히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길은 역삼동 쪽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 당시 영동대로 길 양쪽에는 버스 노선을 위한 분리대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밤 11시경 어두운 밤길이었다. 비가 집중호우처럼 쏟아져서 택시 기사가 그 분리대 화단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리막길이고 차도 없으니 속도를 좀 냈던가 보다. 경찰 진술에서 기사가 70km를 달렸다고 했지만 최소한  80km 이상 달렸을 것이다.
택시는 분리대를 들이받고 도로변으로 튕겨 나가다가 가로수에 걸려 급정거를 한 상태가 됐다. 천만다행으로 사고 지점 바로 옆 도로변에 정형외과 병원이 있었다. 택시 기사와 나는 고꾸라져 있는 집사람을 끌어내  등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차체 앞 범퍼에 얼굴을 부딪쳐 크게 다친 집사람은 그날 밤 입 주변에 8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빨도 4개나 부러지고 경추(목등뼈)도 크게 손상을 입은  중상이었다. 나는 뒷자리에 있다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알 수 없지만) 앞이마가 찢어지고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아! 그런데 지금껏 생각해도, 그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사람을 응급조치해 주셨던 그 의사 선생님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외과 의사라고 평하고 싶다. 80바늘을 꿰매는 과정에 찢어진 입술과  입 주위 피부조직을 어떻게나 정밀하게 잘 다지고 맞춰 주었던지, 그 후 1년쯤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보니 코밑에 약간 희미하게 표가 날 정도이지 남이 보면 전혀 모를 정도로 수술 자국이 깔끔했다. 그나마 얼마나 큰 다행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가지 않아도 될 공사 현장을 구태여 다녀오다가 큰 사고를 낸 자신을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불행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통사고 난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집사람 곁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장모님이 병실로 들어오셨다.
얼굴과 머리통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딸자식을 내려다 보시며 한참을 울고 나시더니 내게 불쑥 흰 종이 하나를 내밀어 보이셨다.
이게 웬일인가! 멀고 먼 일본 땅에 계시는 장인어른(재일 교포)께서 지난밤에, 그것도 우리가 사고 난 그 비슷한 시간에 심장마비로 운명하셨다는 전보 쪽지였다.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장모님을 뭐라고 위로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울기만 했다.
그 당시 우리 내외는 일 때문에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해서 시골에 혼자 계시는 장모님더러 서울에 올라오셔서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드려 역삼동 전셋집에서 함께 모시고 있었다. 아! 그런데 어쩌다 이런 불행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단 말인가!
한마디로 미칠 지경이 되었다. 어떤 검은 함정ㅡ 인생의 험악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2.
사고 난 다음 날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한 후 석 달 가까이 집사람과 같이 한 병실에서 지내다가 12월 초순 무렵 퇴원했다.
그동안 회사 직원들 십여 명 인원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일거리는 전혀 없었다.  이전부터 몇 가지 사업 건을 추진해 왔으나 회사 대표 내외가 장기간 입원하게 되자 협의해 왔던 모든 일이 중단되거나 다른 회사로 돌려졌다.
아산화력발전소 일은 박수현 소장이 잘 마무리해서 10월 중순에 무난히 준공검사를 마쳤다. 그러나 참으로 암담한 일이 발생했다. 12월 초 퇴원하는 대로 바로 양재동 건축 현장으로 달려가 봤다.
공사는 건물 뼈대만 세워져 있고 아직 지붕 상량도 올리지 않은 상태로 중단되어 있었다. 현장에는 집 지키는 노인 한 사람만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현장 소장이 어디 갔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실은 우리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공사를 중단하려고도 생각했으나, 이미 벌려 놓은 일이고 또 집사람 동창생 되는 분(A)이 자기가 책임지고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니 그를 믿고 은행 통장까지 맡기게 되었다.
그런데 석 달 후 퇴원하고 나와보니 이 모양이었다. 겨우 수소문하여 A를 찾아가 만났더니 도리어 우리를 보고 통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대치동에서 집을 몇 채 동시에 발주하여 공사를 하다 보니 자금 사정이 나빠져 우리 돈까지 쓰게 되었다. 부득이 이번 겨울 지나고 봄에 집을 완성해 주겠으니 좀 참아 달라. 그리고 역삼동 전세 기한이 지나서 어디 갈 데가 없으면 자기 집에 와서 한두 달 있는 동안에 다른 전셋집을 얻어 주겠노라고 했다.
아이고! 참으로 암담했다. 그동안 아이들(2명)을 돌봐주신 장모님을 시골로 내려가시게 하고 우리 네 식구는 할 수 없이 A의 집에 보름 정도 머물러 있다가 나중에 역삼동에 방 한 칸(지하실 방) 월세 집을 얻어 나가서 그 혹독한 겨울, 참담하고 불행한 겨울을 지냈다.  

봄(3월)이 되었으나 A는 차일피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을 계속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 직원을 반으로 줄이고 아산화력발전소 준공 이후에 받은 공사 잔금으로 겨우겨우 회사를 운영했다.
어떤 이는, 특히 친가 부모님은 회사를 치우고 어디 취직이나 하라고 야단치듯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때 우리 내외는 결심했다. 죽어도 회사 문은 닫지 않겠다고! 더구나 아내의 전공을 살려보겠다고 세운 회사가 아닌가! 또한, 늦깎이 학생이지만 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인생의 진실을 찾고 세상 속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 보겠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내가 아닌가!

이 정도 고난과 역경이 있다고 해서 회사 문을 닫고 물러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게임'에서 영원히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굶어도 결코 회사 문은 닫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지키며 우리 두 내외는 다시 한번 창업한다는 마음으로 봄의 아지랑이 피는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4월 중순부터 건축 공사를 재개했다. 모든 일을 직영으로 처리했다. 공사비는 우리가 오히려 통사정하여 A로부터 받아낸 일부 현금과 명동에서 복덕방 하는 영감님의 알선으로 사채를 쓰기로 했다. 일꾼들은 박수현 소장이 소개해준 인부들을 공사종류별로 맡겨서 시켰다.
처음 지어 보는 집이지만 그런대로 무난히 잘 지었다. 다만 공사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공기가 5개월이나 걸렸다.
9월 말에 입주한 다음, 집에 살면서 매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은광여고 후문 쪽 언덕배기라서 위치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집이 팔리지 않아 결국 겨울을 신축 주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다음 해(1981년) 1월 초에 셋째 아이(현주)를 낳았다. 나는 한전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아산화력발전소 '턴 키' 방식으로  삼천포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 설계업무에 주력했고, 집사람은 봄 시즌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원공사뿐만 아니라 농장 조성이라던가 시내 빌딩에 나무 몇 주 심어 주는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맡아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복리 이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일 년 정도 살면서 집을 팔아보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10월 말에 사채권자에게 집을 통째로 넘겨주고 나왔다. 그러고 나서 거처를 옮긴 데가 역삼동 연립주택단지 사이의 공터에 10평 규모로 지은 비닐하우스였다. 난생처음으로 비닐하우스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참담한 상태에서도 우리 내외는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엘리트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결코 망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명적 자존심' 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신 분들과의 관계가 너무나 소중했다. 집사람의 교회 교우들은 물론이고 사업과 사회활동을 통해 만난 분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주신 몇 분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그 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이나 명예보다 더 소중한 '사회적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또한, 고생해서 지은 집이지만 부채 청산용으로 털고 나니 돈에 매여 안달하던 마음이 많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비닐하우스 생활을 택했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빚지고 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기왕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유능한 사업가가 되어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또한 이웃을 위해 선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졌다.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밑바닥에서 벽공을 바라보며 심기일전하여 새 삶을 살아 보자는 결단이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는 역설적인 계기가 되었다. 설사 그것이 '시지프의 고통'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고달팠다. 이년 기한으로 세를 얻은 300평 공터의 전면도로 쪽에 수목 전시장 형태로 상록수를 잔뜩 심어 놓고 그 나무들 사이로 샛길을 만들었다. 비닐하우스에 이르는 진입로였다.
뒤편 빈 땅의 한쪽 편에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전기와 수도는 담장 너머 옆집(태화연립주택)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그리고 화장실은 유원지에서 쓰는 간이화장실 한 세트를 구해서 설치했다.  비닐하우스 안에 2평 되는 부엌을 칸막이로 막아 놓고 연탄 아궁이를 만들어 솥을 걸었다. 방바닥은 흙을 돋우어 온돌형으로 난방을 했으며 시멘트 바닥으로 마감한 후 그 위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그렇게 해서 여섯 명이 한방에 자면서 겨울을 지냈다. 우리 내외와 아이들 세 명, 그리고 또 한 명은 아내가 무남독녀라서 외롭다고 장모님이 오래전에 세 살짜리 여식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는데, 그동안 대구에 있다가 장모님 대신에 갓난아이(막내딸)를 돌보려고 올라온 처제(당시 14살)다. 슬프지만 참으로 특수한 '실험적 인간조건'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더는 내려갈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의 실존적 진면목을 체험하는 긴박감이 몸서리치게 침습해왔다.

#3.
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아내는 봄철 공사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맡아놓은 일감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처제와 함께 아이들 셋을 데리고 뚝섬유원지로 놀러 갔다. 어린이날이라 이날 만큼은 특별히 아이들에게 부모 구실을 잘 해 주고 싶어서다. 수양버들 숲이 우거져 있는 공터에 어린이 놀이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간식과 마실 음료를 사준 다음 자기들끼리 놀아라 해 놓고 나는 물가로 갔다. 물가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잔잔히 흐르는 물결 위에 햇빛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반쯤 감은 눈의 망막 위로 지난 세월에 겪은 여러 가지 사연들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되새겨진다.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가 연상되었다.
책에 보면, 강변에서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며 수많은 사람의 얼굴로 윤회해온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도 그와 같아서 수많은 사연의 얼굴이 윤회하며 현재의 나를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갑자기 이 혹독한 인연을 끊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술김에?)불같이 일어났다.  

빈 소주병의 목을 쥐고 물가에 있는 돌멩이를 내리쳤다. 그러고는 깨진 병을 움켜쥐고 왼쪽 팔목을 찔렀다. 겁이 나서 깊이 찌르진 못했다. 그러나 깨진 병을 옆으로 긋기만 해도 정맥을 끊기는 충분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참(1분 정도?)을 바둥대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어린아이 소리가 들려왔다.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니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막내딸(2살)이 땅에 엎어져 있고 (처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같이 놀던 아이와 부딪쳐 넘어진 것 같았다), 아들 둘(9살, 6살)이 그네를 타고 놀다가 동생이 넘어져 있는 곳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덩달아 튕긴 듯 일어나 달려갔다. 깨진 병을 그냥 물가에 집어 던진 채로…. 흙 묻은 얼굴로 울고 있는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이 어린것을 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가라는 생각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새 화장실에 다녀온 처제에게 집에 갈 준비를 하라 일러 놓고 나는 다시 아까 앉아 있었던 물가로 갔다. 깨진 병을 주워 모았다. 손에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렀다. 영혼의 핏물 같은 슬픔과 회한이 뼛속 깊이 흘러들었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깨진 병 조각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후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1982년 어린이날 행사(?)였다.  

택시가 역삼동 수목 전시장 앞에 도착했다. 큰 애 둘은 학교(역삼초등)에 가서 좀 더 놀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하라 하고 막내딸을 업은 이모와 함께 먼저 비닐하우스로 돌아왔다. 얼굴과 손발을 씻고 하우스 안에서 쉬고 있는데 담장 쪽에서 애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오는듯한 인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우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큰 애 둘이서 막 담장에서 뛰어내린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너희들 왜 담을 타고 넘어왔냐고 야단치며 물었다. 그때 큰아이가 했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못이 박혀있다. " 아빠, 저 길로는 못 들어 오겠어요"  바깥 도로에서 비닐하우스 쪽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가리키며 울먹이던 그 말을 나는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다. 어린 마음에 비닐하우스에서 산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담장 건너 연립주택에 사는 것처럼 주택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담장을 타 넘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알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밖에 놀러 갈 때도 늘 그렇게 담장을 넘어서 들락날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어린이날),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집사람과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연초부터 공사를 수주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었다.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주눅 들지는 않았다. 각오하고 나서니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태연하게 사람들을 만났다. 로비한답시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런다고 일(큰일)이 금세 손에 잡히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턴 키'방식으로 접근하여 무상으로 설계해 주었던  삼천포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가 3월 초에 발주되어 도급업체인 한라건설로부터 지명입찰에 참여토록 요청을 받았었다. 결국, 돈이 될만한 식재 공사는 도급업체와 관계가 깊은 D 회사가 가져갔고, 우리 회사는 단종(식재 공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까다롭고 이윤이 박한 준공기념탑설치공사와 부대시설을 맡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한전 측에서 끝까지 도움말을 해 줘서 받았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 일조차도 못 받았을지 모른다.  '실력과 성의'라는 두 팻말을 달고 '실성'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내가 측은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 대견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끝까지 의리를 지켜 주었고, 그럴수록 나는 일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매월 2회 삼천포 현장에 내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박수현 소장을 도와 작업을 독려했다. 그런 가운데 어린이날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에 다녀온 그 날 나는 자신의 불행보다 더 큰 자식들의 아픔을 깨닫고 부모로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열심히 일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철이 되자 일감도 제법 많이 늘었다. 한전 공사는 거의 나 혼자서 관리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일은 집사람이 직원들을 데리고 직접 실무를 맡아 일을 했다. 작업의 수준과 전문가적 역량이 점점 더 크게 향상되는 걸 느꼈다. 집사람을 칭찬하고 직원들을 격려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사내 분위기가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회사에 대한 주변의 신망도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 내외가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도 함구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우리 하우스에 데리고 온 사람이 없다. 심지어 부모 형제들조차도 전혀 모르게 했다. 교인들만 몇 분 고정적으로 심방을 와서 기도를 해 주고 간 게 까짓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10월 초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다. 토요일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책을 읽고 있는데 집사람이 "동엽이 저거 아부지요"라고 불렀다.
우리 내외는 쑥스러워서 서로 '여보, 당신' 소리를 못 했다. 왜 그러냐고 반문하듯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이렇게 찬찬히 말했다.
"내일이 추수감사절인데,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안정이 되었으니 내일 추수감사절 헌금을 좀 하고 싶어요."
그리하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동안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이 교회 가는 걸 한 번도 막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착해서라기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보편타당한 철학적 상식에 따랐을 뿐이다.  

그다음 날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에 또 집사람이 "동엽이 저거 아부지요"라고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 교회에 추수감사절 헌금을 드렸고 그동안 몇 년간 제대로 헌금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마음먹고 좀 많이 했노라고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집사람이 다시 한번 나를 빤히 쳐다보며 추궁하듯 말했다. "얼마 했냐고 왜 안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뭐하나. 헌금했으면 됐지." "그래도 한번 물어봐요" 그래, 얼마 했어?" 그러자 집사람이 정색하며 대답을 했다. "헌금…. 오백만 원 했어요." 나는 그 순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내가 내 손을 잡아 이끌더니 "미안해요…. 고마워요."라고 하면서 눈물 젖은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왔다. 말없이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긴 아내를 엉거주춤 끌어안고 있다가 이윽고 나는 오른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입을 뗐다. "어쩔 수 없지 뭐. 우야겠노. 이미 헌금을 했다는데…. 잘했어. 잘했어요" 그때 헌금한 오백만 원은 당시 비닐하우스에 살며 어렵게 저축해 온 전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밤 우리 내외는 또 한없이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다. 아!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4.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해 추수감사절 이후 분명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 가지 특이점들이 나타났다. 우선 한가지, 집을 이사하게 됐다. 10월 중순, 삼천포화력 준공대비공사를 마무리하느라 바빴을 때다. 삼천포 현장에 있는데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1년 가까이 우리에게 전기와 물을 공급해 주었던 옆집 태화연립 104호에서 자기 집을 사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는 거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일반시세보다 높지 않으면 무조건 사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 다음 주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계약을 했고 두 달 후 12월 중순에 이사를 마쳤다. 비닐하우스 생활 13개월 만에 밑바닥을 딛고 정상적인 생활의 무대 위로 기어 올라온 셈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했던 것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새로 이사한 집에서 교회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일이다. 집사람도 그랬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행복감을 느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만에, 진실로 오랜만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기쁜 성탄절을 맞이한 것이다. 그날 우리 내외는 큰 애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특별한 제안을 했다. 아이들의 공부와 생활습관 지도를 위해 가정교사를 채용해 주기로 한 일이다. 아이들은 물론 좋아했다. 다름 아니라 S대 공대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8촌 조카에게 미리 부탁했었다. 조카는 그 후 석박사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 아이들 셋을 잘 지도해 주었다. 우리 내외가 건설 분야 직업상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아서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는데, 조카가 함께 생활하게 됨으로써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훈육에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로, 10월 말경 오랜만에 현대건설 토목부에서 전화가 왔다. 바쁘지 않으면 한번 본사를 방문해 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3년 전(1979년) 아산화력발전소 준공대비공사를 마친 후 그동안 특별한 프로젝트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친교는 계속해오던 참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봤더니 공무를 담당하는 P 부장이 울산에 있는 현대건설 영남지사(본사 토목부에서 관장)로부터 올라온 품의서를 보여 주었다. 공문을 보니 '부산충혼탑건립공사'의 하도급을 맡을 작업반(하도급업체)을 결정하여 이른 시일 내 현장에 투입해달라는 요청이었다.

P 부장의 설명을 들어본즉슨 이랬다.
  부산시가 발주한 대청봉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원래 용두산 공원에 있었던 충혼탑이 부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충혼탑은 대청봉으로, 경남도충혼탑은 창원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부산시 지하철(1호선)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6개 도급업체가 성금을 모아 부산충혼탑을 건립하여 헌납하는 일이었다. 이 공사의 수주를 전담했던 영남지사에서, 낙찰을 받은 후 처음에는 후속 공사까지 기대하면서 좋아라고 파티까지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작업반을 선정해 달라고 본사 토목부에 품의가 올라와서 알아봤더니 아무도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었다고 한다. 공사종류 상 건축부가 할만한 일이다 싶어서 본사 건축부로 이첩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공사 자체도 힘들지만, 실행예산을 짜보니 도급계약금액보다 하도급 견적이 훨씬 더 많이 나와 적자 현장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공사내역 중에 화강석 판석 물량이 많아서 이를 대량 취급하고 있는 주택사업부에 협조 요청을 했으나 거기서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품의서를 도로 영남지사에 내려보내야 하는 시점에 아산화력발전소 준공기념탑공사를 했던 반도조경공사가 혹시 이 일을 해낼 수 있으려나 하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을 받고 며칠간 심히 고민했다. '현대'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도면과 공사내역을 살펴봤더니 참으로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대청봉 꼭대기에 70m의 탑을 세우는 일로써 작업 여건이 최악인 현장이었다. 설계는 당시 김수근 대표(설계사무소 공간)와 쌍벽을 이루며 한국건축계를 이끌어 온 김중업 선생이 주력했던 작품이다. 나는 먼저 박수현 소장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도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내가 다그치듯 물었다.
"삼천포화력 인부들을 용병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목수팀에다 대형 철물 구조물을 다루는 작업반을 갖다 붙이면 한번 해 볼 만 하지 않겠습니까?"
"일 이야 하면 되겠지만……. 돈이 문제지요. 이 공사 백 프로 받아도 아까지(손해)납니다." "손해나면 내가 나지 어디 박 소장님 보고 물리라 할까 봐서요?"
의사 결정을 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이럴 때는 나 혼자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불을 꺼놓고 곰곰이 숙고하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명상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덜컥 들었다.
"현대건설을 이기는 일이 내가 사는 길이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더이상 다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다음 날 현대건설 토목부에 부탁하여 영남지사에 연락을 취해 놓은 다음 다짜고짜 식으로 울산에 내려갔다. 그리고 영남지사장인 K 전무를 만나 이렇게 제안했다.  

"현대건설이 수주한 금액의 90%만 받겠다. 100%를 달라고 하면 내가 도둑놈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모든 작업은 우리가 책임지고 할 테니 자재만 대 주고 기술적인 문제나 인력을 쓰는 등 공사방법에 대해선 일절 간섭하지 말라. 이 조건이 수락되면 우리 회사가 이 일을 맡겠다."
K 전무는 횡재를 만난 사람의 표정을 짓더니 내 손을 불끈 잡아 주었다. 당장 그날부로 계약을 맺었고 공사에 착공한 지 10개월 만에 준공했다.
현대건설로부터 받은 도움, 즉 아산화력발전소 '턴 키'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건설 인생의 새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한 그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은, 우리 회사가 현대건설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 일하고 한치라도 더 앞선 기능으로 현장의 목표를 달성해 주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의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시하고, 돈이나 명예보다 '일'로 깨닫는 성취감과 인간적 자긍심을 더 소중히 여기며 '가치 창출'하는 일이야말로 사회 속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빛나는 선(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적 기개와 확신과 자유의지의 소산이 그 '어렵고 힘들고 돈도 안 남는 공사'를 맡아서 아무 탈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해낸 근본적 동력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때 나이가 우리 나이로 35세였다.  

세 번째 이야기가 참으로 은혜로운 내용이 될 것 같다.
태화연립으로 이사를 하였고, 부산충혼탑건립공사를 착공한 그다음 해(1983년) 봄이다. 4월 중순 무렵으로 기억된다.
직원들은 모두 외출하고 집사람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문의 전화였다. 주택을 신축하고 정원공사까지 마쳤다. 그런데 집주인이 정원공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다시 보수공사를 하려고 한다. 지나가다가 수목 전시장 간판을 보고 전화를 했다. 이런 일도 귀사에서 해 줄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집사람은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온 분과 약속을 하여 그다음 날 신사동 영동호텔 앞에서 만나 함께 논현동 주택으로 갔다. 회사 중간 간부직원 같아 보였는데 본인의 신분은 밝히지 않은 채 현장 안내를 마친 후 며칠 내로 보수계획안을 갖다 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며칠 후 제출한 계획도면을 검토한 고위 인사가 곧 작업을 시작하라고 지시를 하셨다. 그때 맡아서 한 일이, 당시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의 논현동 주택 현장이었다. 전화를 걸어 왔던 중간 간부직원은 현장 소장 L 과장이었고, 고위급 인사 되시는 분은 건축부 최고 책임자인 K 부사장이셨다.
그 '우연의 접속'이 우리 회사의 진로와 발전에 일대 혁신을 이끌어 주었다.  

논현동 작업의 결과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가 보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K 부사장께서 성북동에 있는 현대건설 영빈관 조경공사를 맡기셨다. 중동 출장을 다녀오신 정주영 회장께서 정원을 잘 꾸몄다고 칭찬을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현대건설 건축부에서 발주하는 대부분의 조경공사 하청 업무(직영공사는 물론 도급공사까지도)를 우리 회사가 도맡았다. 마치 건축부의 한 부서인 양 모든 일을 터놓고 기획하고 예산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집사람은 이 모든 것을 순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의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어려운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을 지켜낸 집사람의 지극한 신앙과 헌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일이라 생각했다. 1982년 추수감사절 이후 우리 집과 회사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희망과 도전, 감사와 회복이 넘치는 새 삶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5.
부산충혼탑(높이 70m)의 규모는 대단하다. 대청봉 정상에 약 400㎡ 원형의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연못 위로 (여러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풍압을 대비하여 설계한) 9개의 콘크리트 벽체(화강석 판석 마감)가 원형 열주(列柱)를 이루고 있으며, 그 열주의 상단에 브래킷으로 9개 벽체를 연결하는 링 콘크리트 구조체가 공중에 붕 떠 있는 형상으로 설치되어 있다(탑신부 39m). 그리고 그 링 콘크리트 내벽으로부터 9개의 갈빗대 형 철 구조물이 솟아나 하늘을 향해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여지고, 다시 그 위에 최상부 철탑이 3층 탑 모양으로 올라선 모습이다(상륜부 31m). 탑신 아래 연못 중앙에는 위패를 모신 반구형<돔>의 영령실이 있으며, 다리로 건너가게 되어 있어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상징했다. 탑 공사도 시공하기에 엄청나게 어려웠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경 쓰인 구간이, 대청봉 공원주차장에서 충혼탑에 이르는 경사면 돌계단(폭 20m, 사면 길이 100m 가량) 작업이었다. 폭우가 오거나 세월이 지나도 그 돌계단이 침하되지 않도록 경사면을 안정시키는 기초작업이 매우 중요하고 험난했다. 여태껏 발주된 각종 메모리얼 타워 가운데 이토록 장대하고 웅장한 작품을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산봉우리 정상에 이토록 위험하고 난이도가 큰 구조물을 세워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이 공사 기간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무용담을 다 얘기하자면 밤을 새워야 한다. 그만큼 사연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예를 들면, 탑신부 공사를 마친 다음 상륜부 철탑을 세울 때 헬리콥터를 사용하라고 권하는 부산시 관계자들의 건의를 조정하느라 애를 먹은 일(*헬리콥터로 한강 올림픽대교 교각 상단에 조각 구조물을 설치하다가 사고 난 것을 기억해보라) 도 생각나고, 경사면 돌계단의 기초작업을 위해 백 개도 넘는 목 파일을 박은 일(*몇 년 전 부산 출장 시 본 재단 이동탁 사무총장과 함께 거의 35년 만에 현장을 둘러봤을 때 한치의 침하도 없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이며, 무엇보다 탑신 최상부 3층 탑 용접공사를 하다가 인부 한 명이 떨어져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9개 갈빗대 형 철 구조물을 끌어 올린다고 쳐놓은 와이어 줄에 한쪽 팔이 걸려 살아난 일(*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갔을 때 그 인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3일 밤낮을 잠만 자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요 장면을 보듯 선명하게 기억된다.  

준공식 하루 전날 밤이었다. 경내 모든 구간의 청소를 깨끗이 완료해 놓고 박수현 소장과 작업반 팀장들을 불러모아 음식 대접을 한 다음, 나 혼자 소주병 하나를 들고 충혼탑이 서 있는 대청봉 정상으로 올라갔다. 검은 허공에 (화강석 판석 색깔이 희므로) 허옇고 우람찬 로켓형 우주선이 산꼭대기에 내려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정경이었다. 그 돌계단을 한 단씩 올라가는데 갑자기 찔끔찔끔 눈물이 났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가 연못 옆 화단 언덕에 앉아 시내 야경과 부산항만 전경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가!
'일'을 완성해 놓은 다음에 느끼는 안도감과 벅찬 성취감으로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려니와 그보다 마침내 '현대'를 넘어섰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욱 감동케 한 것 같다. 그렇다. 뭔가 이루어낸다는 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고난을 이겨 낸다는 것. 역경을 이겨 낸다는 것은 자신을 이겨 낸다는 말과 다름없을 테다. 결국 '현대'를 이겨 냄으로써 자신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충혼탑공사로 번 돈보다 수십 배 더 고귀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마음 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굳건한 틀이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비즈니스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하는, '자생력'을 키우는 길잡이 역할까지 해 주었다.  

흔히 '일'을 대할 때 나타나는 세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며, 둘째는 어떤 일이 있는지는 알지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이며, 셋째는 그 일을 알고, 그 일이 잘되도록 이루는 사람이라고 한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일'을 대할 때마다 항상 세 번째 타입의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써 왔다. 이번 부산충혼탑건립공사도 이런 정신으로 임했다고 자부한다.
여기서도 '경북고 야구'를 통해 배운 감투정신과 팀워크로 도전하는 플레이 메이커(Play Maker)로서의 리더십을 자신에게 부여했다고 믿어진다. 그것이 준공식 전날 밤 대청봉 정상에서 밤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베푼 가장 값진 보상이었다.? ?

다음날 준공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마침 8.15광복절과 겹쳐 무슨 잔칫집 행사처럼 흥겨웠다. 부산시장과 국회의원들의 축사, 성금을 출연한 6개 업체 대표들의 메시지가 장시간 계속되었고, 시공회사 현대건설 이명박 회장과 설계자 김중업 선생이 감사패를 받았다. 준공식 마지막 순서로 테이프 커팅을 마친 후 행사 참석자들이 앞다투어 돌계단을 밟고 대청봉 정상으로 올라갈 때 나도 함께 올라갔다. 집사람은 (논현동 주택 정원공사 건으로) 이명박 회장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악수는 했지만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김중업 선생은 공사 도중에 두 차례 다녀 가셨고, 그때마다 시공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책임자 입장에서 시공 방법과 공정에 대해 브리핑을 했기 때문에 나를 충분히 인지하고 계셨다. 그날 대청봉 정상에 올라가 충혼탑을 하늘로 올려다보면서, 허공에 붕 떠 있는 링 콘크리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하신 말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설계했지만, 너무 어려운 설계를 했어요. 이 사장이 나보다 더 실력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릴 줄은 알지만 이렇게 시공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소" 그날 준공식에서 받은 인사말 중 가장 큰 위로를 받은 대목이다. 그 한마디가 후일 어떤 어려움을 만나고 위기가 닥쳐도 흔들림 없이 정면 대결하는 용기와 담력을 갖도록 만든 '영혼을 춤추게 하는 촉매'가 되어 주었다.  

이런 뜻에서, 지금, 이 순간 고난과 역경을 당하고 있는 분들께 '영혼을 춤추게 하는 촉매'가 될만한 몇 마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첫째, 긍정의 힘을 믿어라. 그 믿음을 굳게 지켜라.
둘째, 아무리 힘들어도 사회적 관계의 끈을 놓치지 말라.
셋째, 일 자체를 즐기고 KnowㅡWhy에 치중하라.
넷째, 감사하라. 감사하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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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업 스토리> ③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1.
중국 무협 소설을 읽다 보면, 무술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려면 '생사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즉시 폐쇄되는 혈맥('임독양맥')이 있는데 이 관문을 뚫고 정진해야 마침내 최강고수(最强高手)로서의 공력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그런 허황한 '생사관문'은 아니지만, 죽을 둥 살 둥 고비를 넘기다가 마침내 자발적으로 도전한 '부산충혼탑건립공사'라는 험난한 산을 넘고 나니 마치 내가 이 관문을 통과한듯한 특이한 느낌과 정신적 공력(?)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이 틀린 게 아닌 것이, 그 이후 어떤 어렵고 힘든 여건의 일을 만나도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으며, 부닥치는 대로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습성이 붙었다. 공사의 난이도나 실행 조건의 유불리를 떠나 '일' 그 자체를 달성하는 데서 오는 재미와 보람이 더 컸다. 마치 무술인이 '무술' 그 자체를 즐기듯이 나도 사업가로서 '사업' 그 자체를 즐기며 일하는 게 자신의 정서에 걸맞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무척 초연해졌다. 특히 '돈' 문제가 그랬다.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벌면 버는 대로, 또는 손해를 봐도 그러려니 하고 담대하게 넘어갔다. 사업을 단순히 돈벌이로만 생각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가치행위'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싫을 리야 없지만, 돈은 사업을 하다 보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돈을  유일 목적으로 삼아 인생의 승부를 걸기엔 너무 치졸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돈벌이 목적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사람에게 매이는 일이 점점 싫어졌다. 사회적 관계를 지키고 존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은 내 양심상 허용할 수 없었다.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생각, 즉 일과 사람을 구분하여 인간관계의 순수성을 지켜가면서 '할 일'을 다 하는 태도가 무척 귀하게 여겨졌다. '철학적 의협심'이랄까? 사람과 사람과의 순수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실한 우애, 소통, 협력, 공감 등이 일을 통해 만나는 사회적 관계(갑, 을 관계)에서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사회적 가치'로서의 맥락이라고 믿어졌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창업 이후 15년 이상 하청업무를 계속하면서 나름대로 지켜온 비즈니스의 모럴이었다.

  그러나 갑, 을 관계에서 그런 일이 평탄하게 유지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산화력, 삼천포화력 이후에도 한전에서 발주한 발전소 관련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 일을 숱하게 했다. 큰일만 챙겨도 삼랑진양수발전소, 고리원자력#3,4호기, 울진원자력 #1,2호기, 한전 본사 사옥, 무주양수발전소, 분당열병합발전소, 영광원자력 전시관 및 #3,4호기 준공대비공사가 대표적이다.
그런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관관계가 있었겠는가. 얼마나 술도 많이 먹고 돈도 많이 뿌렸겠는가. 이런 과정에 가장 싫었던 일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일' 그 자체는 좋아서 했지만,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나의 인격이나 인생 자체가 '을' 또는 '병'의 처지에 놓이는 게 너무 싫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하청 신세를 벗어나는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조경공사업 종합면허(1989년)와 토목건축업 면허(1994년)를 갖추어 작은 기업이지만 원청(도급업체)을 할 수 있는 종합건설회사로 탈바꿈했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렸으며, 그 후 해외건설업(건설엔지니어링, 2003년), 산림사업(산림토목, 2013년), 주택건설사업(2015년)까지 갖추어 명실공히 종합건설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현업에 이르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일관되게 지켜온 두 가지 원칙적인 사업주제(Two subjects of business) 가 있었으니 그것은 집사람과 함께 하는 가족기업형 회사라는 하드웨어를 잘 지키는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토대 위에 어떻게 하면 이를 지속가능한 경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주된 과제였다.  

최근에 이르러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 본다. 나와 집사람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아왔는가?  자문해 보면 불행한 일도 많았지만 일(사업)을 통해서 두 내외가 한 몸처럼 일해 온 것은, 처음에는 부득이한 케이스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일과 삶'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융합체적인 시너지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흔히 말하는 '워라벨(Work-Life Balance)' 차원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균형을 뛰어넘어, '일과 삶'이 서로 섞이고 상호작용하면서 삶이 일을 더 풍성하게 하고 또한 일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의 '워라하(Work-Life Harmony)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면 그건 틀림없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이렇게 말해줘야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해온 집사람에게 만분지 일이라도 그 사랑의 빚을 갚는 셈이 되리라!  

큰아들(이동엽 원장)과 같이 설립한 참포도나무병원도 이런 측면에서 아주 행복한 프로젝트다. 가족 기업형의 병원으로 의료기술과 서비스와 미션 마인드가 함께 어우러져 '일과 삶'이 대를 이어 유기적으로 상호 연계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부모 된 입장에서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나 이런 가족 기업형 회사나 병원이 더 큰 발전을 이루기 위해선 나름대로 특별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과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원리적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하겠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팬테믹으로 인해 기업의 위험관리 중요성과 더불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이행하려는 시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1987년 유엔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가 제시한 '지속가능성'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결합해 21세기 기업경영의 메가 트랜드가 됐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가족기업'도 앞으로, '백년 장수기업'을 목표로 지금까지 연마해온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해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뒤안길을 돌아보니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진다.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의 절개를 지킨 집사람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도, 살 수도 없었으리라! 그 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이, 지금은 복이 되어 오히려 신앙 가족공동체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통로가 되어 주었으니 '고난이 유익이라'라는 성경 말씀이 그대로 믿어진다. 그런 뜻에서 그동안 40여 년에 이르는 건설업 기간에 특별히 생각나고 간증할 만한 일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혹시라도 '나의 창업 스토리'를 읽고 자기 앞의 인생에 가로 놓여 있는 '생사관문'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분이 계시면 서슴지 말고 자신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뛰어나가기를 권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격언이 자신을 이김으로써 마침내 세상을 이기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절륜한 공력'이 되리라 믿는다.  

#2.궁정동 무궁화공원
1993년 3월 초, 김영삼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사업이다.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5채)을 철거하고 시민휴식공원을 만드는 일이다.
6월 말까지 완공해야 하는 긴급 공사로 발주되었기 때문에 시공자가 설계안을 내는 '턴 키'(일괄도급)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관할 구청인 종로구청에서 청와대 내 공사 경험이 다수 있으며 '턴 키' 실적이 있는 종합조경면허업체로 입찰 제한을 했다. 3개 업체가 지명입찰에 응했고 그중에 우리 회사(반도조경건설주식회사)가 포함됐다. 공사비도 적지 않았지만, 문민정부 출범 후 첫 청와대 발주(경호실)공사인 데다 그곳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기에 누구나 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프로젝트였다.  

입찰 일정이 공지되었는데 하필이면 우리 내외가 조용기 목사님(여의도순복음교회)의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성회 수행 기간과 겹쳤다. 집사람에게 입찰 업무를 내가 챙겨 볼 테니 당신 혼자서 성회 다녀오라 하고 일렀다. 그런데 막무가내였다. 해외 성회를 수행하는 기관인 여의도실업인선교회에서 기획팀장으로 봉사하던 때였다(나는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1990년 1월 초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집사람은 하나님과 약속한 일이니까 무조건 성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도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입찰 업무를 몽땅 직원들한테 맡겨 놓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 후 성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유지인 파리에서 하루를 묵고 떠나는 날, 그날이 입찰일이었다. 우리 내외는 조 목사님께 기도 요청을 했고 함께 갔던 실업인선교회 임원들께도 합심기도를 부탁했었다. 우리가 파리(Charles de Gaulle)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밟고 있는데 서울 본사에서 입찰 담당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 우리가, 우리가 낙찰됐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수주한 공사를 어찌 소홀히 했겠는가! 설계안부터 특별히 신경 썼다. 공원 부지 중앙에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자 분수 샘터(2.5m*2.5m 크기의 화강석 통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흘러 내린 물이 사대문을 거쳐  8도로 퍼져 나가는 형태의 의미체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중앙 분수대를 중심으로 무궁화 화단을 조성한 다음 그 외곽으로 원형 산책로와 함께 휴게시설 및 화장실(초가형)을 배치하여 시민들이 편하게 접근하고 휴식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정도면 청와대에서 요청하는 시민휴식공원의 기능은 충분히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히 시민들의 휴식만으로 그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의 한 현장이 아닌가! 그래서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자리에 표석이라도 하나 세우자고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번번이 무시됐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부지 가장자리에, 주택가와 연하여 있는 서쪽 편 땅에 낮은 토산을 조성하고 거기에 3~4m 높이, 30m 정도의 길이로 성벽 형태의 자연석 쌓기를 했다. 그런 다음 그 성벽(역사의 흐름을 상징)이 죽 이어 오다가 갑자기 무너진듯한 자리에 폭 1m, 길이 1.5m 정도로 작은 체구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앞자리에 반석을 앉히고 반석 위에 '새' 형상의 자연석(일종의 표석)을 하나 올려놓았다. 그리고 무너진듯한 성벽의 뒷마당에 30년 이상 되는 낙락장송 세 그루를 심어서 배경을 이루게 했다. 한마디로 말해, 조경 기법을 활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장소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그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조성한 그곳을 매년 10월26일이 되면 빠짐 없이 참배해 왔다.  

준공 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6월 중순쯤이었다. 또 한 번 소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모스크바 성회에 다녀와야 하는 일정과 겹친 것이다. 내가 남아서 작업 마무리를 할 테니 당신 혼자서 성회에 다녀오라고 집사람에게 종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막무가내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도 완강히 항변(?)해서 할 수 없이 경호실 윗분께 사정 얘기를 하고 부탁을 드렸다. 그분 말씀이 "나갈 때는 당신들 마음대로 나가지만, 들어 올 때는 맘대로 못 들어 올 거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한마디로 출국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하기야 경호실 책임자로서, 7월 1일 VIP를 모시고 준공식 겸 공원 개원식을 하는 날짜가 불과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작업을 총괄하고 마무리해야 할 시공회사 책임자 두 내외가 다 빠져나간다고 했으니 그도 크게 당황했을 게 분명하다. 도저히 방안이 나오지 않자 우리 내외는 더는 경호실과 의논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담담한 심정으로 모스크바로 출국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내외가 성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짜가 준공일을 불과 사흘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보통의 경우 청와대 식재공사를 하다 보면 담당자들이 충성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막판에 당치도 않게 자재 반품, 수종 변경 등을 요구하며 갑질을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현장에 회사 대표가 없으니 실무진에게 요구해 봐야 소용이 없었던 게다. 그냥 원래 설계한 '턴 키' 내용대로 시공을 완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원 설계안 그대로 작업을 마무리 한 것이다. 우리 두 내외가 돌아와서 한 일이라곤 고작 호스를 들고 경내 물청소를 도운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의 결과는 어떻게 평가되었나?  

1993년 7월 1일, 궁정동 무궁화공원 개원식에 오신 VIP께서 테이프커팅 자리에서 경호실 관계자들을 치하하면서 크게 만족한 뜻을 표했다. 그러자 이 '일'에 관계해 온 청와대, 서울시, 종로구청 공무원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일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게 아닌가! 이런! 아무튼, 발주처로부터 큰 호평을 들으니 우리 팀도 신이 났고 보람에 넘쳐 한껏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날(토요일) 오후 개원식 행사를 마칠 무렵 MBC 기자가 다가와서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고 해서 기자가 묻는 대로 문민정부의 출현에 따른 시민사회의 반응과 궁정동 안가(安家) 철거 후 조성한 시민공원의 의의에 대해 적당히 답변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저녁 시간에는 관계 공무원들과 지역 주민 대표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느라 뉴스를 못 봤다.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다음 날 주일이었다.  

여의도순복음실업인회관 빌딩 지하실에 차를 주차해 놓고 선교연합회 본부가 있는 8층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동안 수없이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고 수행했지만 한 번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 1층 문이 열리자 조 목사님이 부목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쑥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 나를 보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 이 집사, 자네, 말도 잘 하대"라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 MBC 뉴스를 보신 것이다. 그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느낀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누가 알랴! 그때 내 마음속에는 이런 감동이 메아리쳤다. "아! 하나님이 조 목사님을 통하여 칭찬해 주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차고 넘쳤다. 그렇다. 케냐 나이로비 성회 때도 그랬고, 나중에 모스크바 성회 때도 그랬다. 일 년 전부터 조용기 목사님의 해외 성회 일정을 짜 놓고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 궁정동 무궁화공원 조성공사가 긴급 공사로 발주되는 바람에 공교롭게 입찰 시와 준공 시 두 번 다 일정이 겹쳐 성회에 참석할 수 없는 처지이었지만, 그 개인의 일을 모두 뒤로하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챙기고 헌신한 믿음을 이쁘게 보시고 칭찬하시는구나 라는 게 그때 내가 느낀 감동이고 솔직한 신앙고백이다.  

#3.여의도공원
1971년 여의도에 있던 공군기지가 이전된 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이곳을 신시가지 건설 및 주택용지로 개발하려 했으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시장직을 물러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개발 청사진을 을 주도했던 김수근 대표(설계사무소 공간)의 계획을 취소시킨 장본인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키는, 조경이 잘 된 공원광장계획을 세워서 보고했으나 한마디로 싹 밀어버리고 비상활주로 용도의 콘크리트 광장으로 엎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5.16 광장이다. 그 콘크리트 광장이 푸른 녹지의 대형 공원으로 탈바꿈한 이면에는 우리 회사의 기적 같은 간증 거리가 숨어 있다.  

김영삼 정부 말기로 접어들었을 때(1997년)의 일이다. 당시 조순 서울시장이 대권의 꿈을 안고 추진한 도시개발사업 가운데 하나가 여의도 공원화 프로젝트다. (지하에 근린시설과 주차장을 조성하고 그 위에 공원을 만들었으면 훨씬 더  멋진 도심 시설녹지복합공간이 되었을텐데) 졸속으로 발주한 이 공사의 입찰이 4월에 있었다. 우리 회사도 당연히 참여했다. 저가 낙찰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사전적격심사제도(PQ)를 도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입찰 전에 회사 실적을 증빙하는 자료가 들어가야 했고 5년 이내 국가 공공기관의 표창이나 우수업체 인증을 받은 자료가 있으면 가산점이 붙는 그런 제도였다. 입찰하기 이삼일 전으로 기억된다. 조달청 담당자로부터 표창 자료가 더 있으면 추가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회사가 미리 다 챙겨서 접수(5건)했지만, 혹시 추가할 게 있는지 살펴보라는 내용이었다.  

왠지 이상한(?) 감이 왔다. 나는 직원들을 풀 가동하여 그동안 일했던 공공기관에 찾아가 자료실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5년 전에 주택공사에서 납품우수업체로 표창받은 자료 한 건이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입찰 하루 전에 추가 접수하게 했다. 그 결과 가산점 1점이 추가되어 0.5점 차로 낙찰되었다. 여의도공원 2공구(공원 중앙에서 마포대교 방향 구간) 사업을 맡게 된 것이다. 그 공사 구간 바로 앞에 국민일보 사옥이 있었고 8층(최고층)에 조용기 목사님의 집무실(국민일보 이사장)이 있었다. 집사람과 나는 여의도 공원공사의 수주를 위해 일찍부터 조 목사님과 교우들께 기도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낙찰 소식을 접한 그들은 우리 내외보다 더 좋아했고 자기 일인 양 그렇게 기뻐해 주셨다.  

공사 기간에 조 목사님 집무실에 한 번씩 들릴 때면, 목사님께서 창을 통해 작업 구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 다 우리 정원이다"라고 하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가운데 내게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의 임무(?)가 생겼다.
평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2공구 끝부분 언덕(인공으로 조산한 곳) 위에 정자와 더불어 조그만 폭포가 조성되어 있다. 그 아래에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물은 순환 펌프로 가동하여 24시간 흐르게 되어있다. 원 설계안에 보니 연못이 큰 특징 없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감리단 측과 협의하여 연못 형태를 서울시 지도 모양으로 조정했다. 그런 과정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기도의 제목이 '서울시성시화운동'이었고 지금도 그 제목은 마음 언저리에 남아 있다.  

내가 준거한 성경 말씀은 열왕기하 2장 19~22절이다. 선지자 엘리사가 여리고성에 갔을 때 그 성읍 사람들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했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해서 갖고 오자,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다고 하니 그 후 물이 고쳐져서 옥토로 변했다는 기록이다. 나는 이 '물 근원'이라는 용어를 성경 구절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신앙의 본질적인 그루터기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모든 교육선교와 철학적 이해의 근원이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내가 연길시 북산가 언덕 위에 있는 연변과기대(PUST)를 바라보며 올라갈 때마다 묵상하는 것도 바로 이 '물 근원'이다.  

여의도공원조성공사를 착공한 지 2년 가까이 된 1999년 2월에 준공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적의 선물'로 주셨다고 믿기에 준공일이 다가오자 특별한 기념행사를 열고 싶어졌다.
기독교계 음악선교를 리드하고 있는 분들과 의논한 끝에, 미국, 유럽, 호주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어떤 특별한 이슈가 있으면 날짜를 잡아 공동찬양집회를 열어 주는 'Integrate' 팀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들을 사비로 초청해서 여의도공원 중앙부에 있는 광장에서 이틀간 찬양집회를 개최했다. 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순복음교회 교우들과 일반 청년대학생들도 많이 참석했고, 이 찬양집회를 계기로 기독청년들에게 음악선교와 더불어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새롭게 장려하고 부흥시키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4.경기테크노파크
한국 IMF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11월에 우리나라가 가진 외환이 너무 부족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사건이다. 국가경제가 일시에 침몰하는 현상을 빚었고 기업경영은 최악의 상태에 달한 듯 피폐해 졌다. 부도 업체가 속출했으며 건설업계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우리 회사도 재정적 어려움에 빠져 구조조정에 따르는 비상조치를 했으며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적잖이 매각하여 긴급자금으로 수혈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전에도 어려움이 왔을 때 결심했던 것처럼, 어떤 일이 닥쳐도 회사 문을 닫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소신으로 버티고 응전했다. 그런 가운데 큰 곤경에 처하는 고약한 일이 발생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관공사를 수주하게 되면 상호보증제라는 게 있어서 업체들끼리 품앗이 형태로 주고받으며 보증을 해주곤 한다.
영종도 인천공항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공항청사 주변 식재공사를 맡은 M 회사가 공사이행보증을 요청해 왔다.
전에 신세를 진 업체라 당연하게 보증을 해주었다. 공사 기간이 2년 가량 걸리는 제법 큰 공사였는데 이 업체가 IMF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 견디다 못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잔여 공사가 삼분지 일이나 남아 있었다. 기성고를 이미 많이 받아간 상태에서 부도를 냈기 때문에, 잔여 공사를 다 하려면 15억 원 이상 추가로 투입해야 마무리할만한 일이었다. (업계에서는 M 회사가 일부러 부도를 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몹시 억울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남의 일을 마저 다 해 주려니 '생돈' 거금을 투입해야 했고, 보증 이행을 피하려면 우리 회사도 부도 처리하는 게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죽어도 그 짓은 못하겠고, 참으로 힘들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간절히 묻고 간구했다.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잔여 공사를 우리 회사에서 전적으로 이행하기로 했다. 결국, 일이 다 끝나고 정산을 해 보니 약 10억 원 정도를 밑 빠진 독에 물을 갖다 부은 셈이 되었다. IMF 사태로 위기를 맞고 있던 회사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꼴이었다. 그래도 인내하며 용케 잘 버텨 나갔다.
그러다가 2000년 가을을 맞았다. 안산테크노파크신축공사가 발주되었다. 지금은 경기테크노파크로 불리지만, 당시 통상산업부와 경기도지사 간 기술연구 집적화 연구단지 조성 협약을 맺고 시행하는 특수 비영리법인 사업이며 안산시가 공사를 주관했다. 부지 위치는 한양대 안산캠퍼스 바로 옆이다.  

입찰 준비를 하면서 단독 입찰이 어려워 동양고속건설(주)을 파트너로 잡고 우리 회사가 신랑(주계약자) 역할을 했다.
산을 뭉개고 200,000㎡의 대지 위에 전체면적 4만㎡ 규모의 신축 연구단지를 조성하는, 2군 건설업체(종합건설면허)까지 참여하는 3백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몇 년간 IMF 위기에 시달려 온 업계로서는 상당히 큰 프로젝트로 소문이 났었고, 수주 경쟁이 치열했다.
입찰은 오후 3시에 있었다. 5시경 입찰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 우리 2등 했어요."  

건설 분야 입찰에서 '2등'이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학교 공부나 콩쿠르 시상식 같은 데서는 2등도 있고 3등도 상을 주지만, 입찰에서 2등은 죽은 몸이다. 그날 본사 직원들은 낙심하여 누구는 울기까지 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2등이라니! 차라리 꼴찌나 하고 말지 이런 심사조차 났다. 우리 내외도 기분이 가라앉아 일이 더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저녁 먹고 술이라도 한잔하라고 일러 놓고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왔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다음  7시 뉴스를 보고 있는데 화면에 '퇴출 기업' 명단이 수십 개 죽 뜨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명단 가운데 오늘 입찰에서 1등 한 삼익건설(주)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일순 심장이 멎는 듯한 감을 느꼈다.  

나는 부랴부랴 발주처에 전화해서 물어봤다. 1등으로 낙찰한 회사가 퇴출 기업이 되면 그다음 낙찰자가 누가 되며 또는 재입찰을 하는 것인지 떨리는 마음으로 질문했다. 담당자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1등은 죽고 2등이 1등 되는 겁니다"
그날 밤 우리 내외는 또 한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성경에서 '거듭난다.'라고 한 말이 실감 났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공식적으로 계약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고비를 넘겼다. 본디 3등이었던 삼성물산(건설 부문)이 2등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1등으로 회생한 무명의 중소업체를 어찌하든 젖혀 보려고 백방으로 힘을 썼던가 보다. 우리 회사의 실적과 세무 관련 사항, 기술 인력 및 면허 규정에 이상이 없는지 샅샅이  체크를 했다. 발주처에서도 시간을 끌면서 상대방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입찰한 지 두 달이 지나도 낙찰 선언을 하지 않자 지역 사회에서 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K 일보에서 이를 취재하고 기사화하자 발주처에서 며칠 가지 않아 낙찰 선언을 해 주었다. 그때가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그 후 약 2년에 걸쳐 공사를 마치고 정산을 해 보니 우리 회사의 몫(토목, 건축, 조경)으로 일한 결과로 얻어진 이익금이, 2년 전 영종도 인천공항 조경식재공사보증 이행으로 치렀던 손실금 10억을 훨씬 능가했다. 아! 참으로 신비(?)한 감동을 했다. 하나님께서 옆에 계셔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그분이 필요한 때에 적절히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섬짓할 정도로 강력한 초월적인 힘(Divine Power)이 느껴졌다.
지금도 회고해 보면, 당시 회사를 지켜보겠다고 '생돈'을 퍼부어 가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곤혹감으로 일했던 영종도 하늘이 이제는 그립기 조차하다. 그 한없이 힘들고 억울했던 심정을 위로하시면서 새롭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5.
이상으로 몇 가지 중요하고 은혜를 만끽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곰곰이 되새겨 보니 나도 참 파란만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 이런 일들뿐이겠는가!
자칫하면 집사람과 이혼할 뻔했던 일도 있다. 88올림픽과 더불어 회사가 크게 신장하고 종합건설면허까지 보유하게 되니 조경공사 부문에만 안주해 있을 게 아니라 좀 더 큰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때 당시 여러 군데 골프장 조경 및 토목 쉐이핑 작업을 수주하여 시공했고 또 미국 유명 골프장을 돌아볼 기회가 있어서 차츰 골프장 건설사업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던 참이었다.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나는 1990년 1월 초부터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해 6월에 교회 식구들과 같이 중국여행을 다녀오는 과정에, 중국 그 넓은 천지에 골프장이 북경, 상해 딱 두 군데만 있고 그것도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한중 수교가 되기 전에) 빨리 가서 선수를 쳐야 되겠다는 들뜬 심정으로 산둥반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칭다오 석노인관광개발지구 안에 18홀 골프장으로 책정된 대지를 매입하려고 애쓰다가 농민들 토지 보상 문제가 어려워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국가 주석이던 양상쿤 주석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김진경 박사(연변과기대 설립 총장)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때 칭다오 석노인관광개발지구에 골프장 건설계획을 세우고 매월 두 차례 칭다오를 방문하여 시(市) 관계자들과 협의하는 과정에, 옛날 독일 조차지역에 조성되었던 별장들 가운데 위치가 좋은 곳을 택하여 석노인골프장의 숙박 시설(호텔 및 펜션)로 이용할 계획도 같이 세웠다. 그러다가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집사람이 내가 칭다오만 다녀오면 집을 사겠다고 하니 "당신 여자 생겼지! 여자 생긴 게 틀림없어! 중국만 갔다 오면 집 사겠다고 하니,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혼장에 도장 찍어 놓고 하세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불신과 오해가 점점 더 깊어 가던 참에 북경에서 우연히 김진경 총장을 만난 것이다.  

그때 나는 돈 벌러 갔지만, 미국에 있는 재산까지 팔아 와서 조선족 사회를 위해 대학을 세우겠다고 설파하는 김 총장님의 말씀을 듣고는, 가슴을 치는 충격과 함께 오랫동안 '세속의 덫'에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이 깜짝 놀란 듯 깨어났다.  젊은 날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불교 철학까지 전공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그 철학적 탐구 정신의 아궁이에 기름을 갖다 붓는 듯한 영적 감동을 느끼게 됐다. 결국, 그 후 중국에서의 골프장 사업 계획을 모두 접고 김진경 총장과 함께 대학(연변과기대)을 세우고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사업(이 사업은 돈 버는 사업이 아니고 돈 쓰는 사업이다)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게 되었으며, 그런 '선한 일'에 집사람도 흔쾌히 동참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겠는가! 거기로부터 인생 후반전의 새길이 열렸으며 또한 '일 '벌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글로벌 미션(CBMC실크로드 미션, 환황해경제기술교류협력, 동북아공동체문화사역 등)과 함께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일(평양과기대 사역)까지 맡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그렇게 연변 땅에 인연을 쌓아 가면서, (3년간 애쓰다가 무산된 일이지만) 연길시 박동길 시장을 모시고 한전 본사를 드나들며 연길에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해 보겠다고 쫓아다닌 일이며, 그때 중국 길림성 관료들과 어울리며 만일 그 일이 성사되면 발전설비 자재를 나진항(*항만증축계획 포함)을 통하여 훈춘-도문-연길로 수송할 수 있도록 산업도로를 신설하고, 거기에 연하여 나진항 배후지역에 중국과 남북한 합작으로 신경제 도시를 건설하여 국제무역항으로 키우는 일도 같이 해 보자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호기를 부렸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런 '개발협력(Cooperative development)'방식의 창의적 대안으로 남북한에 새 길을 열고, 두만강유역개발(UNDP)에 새로운 전기(환동해 유라시아경제권)를 마련함으로써 장차 중국 동북 3성 지역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도 함께 연결하여 잃어버린 한민족의 역사ㅡ '발해의 꿈'을 오늘에 되살리는 '그랜드 비전'의 무대에 여러분 모두를 초청하고 싶다. 기독실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창업 스토리'를 나누다가 그만 여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글을 읽는 청년들에게 진정을 다 해 고하고 싶다. "청년들이여! 큰 야망을 품어라! 성문으로 나아가 백성들이 올 길을 수축하며, 돌을 제하고,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신아시아시대의 미래 지평을 선도하는 BTS(Big Team Spirit)의 총아가 돼라!"
이런 희망으로, 늘 외롭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추스른 몇 가지 나의 다짐을 선물로 남기고 싶다.  

첫째, 사람에게 매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
둘째, 한 우물만 파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셋째, 죽기까지 사명(Business as Mission)으로 일한다.
넷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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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승율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은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을 역임하였고,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역임,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으며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동북아 전문가로서 각종 국제포럼 및 한반도 통일 사역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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