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 햇빛을 보다
이자, 햇빛을 보다
  • 글쓴이=허구생 (단국대교수)
  • 승인 2019.02.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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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제적 영향이 가장 컸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앗아간 흑사병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반해, 이탈리아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이탈리아 경제가 비교적 형편이 좋았던 이유는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농업경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과 상업이 받혀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 전체에 인구 4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는 파리를 비롯하여 모두 19개였는데, 이 중에서 이탈리아 도시들은 11개로 전체의 절반이 넘었다. 제조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 도시경제에서는 필요에 따라 대금업과 이자가 공공연히 허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위대한 피렌체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었던 건,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로 대표되는 메디치가(家의) 경제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재산의 상당부분은 이탈리아 뿐 아니라 런던과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 여러 지역에 지점을 가지고 있던 대금업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부자는 이들뿐이 아니었다. 1427년 실시된 세무조사에 따르면, 당시 피렌체에는 연간 수입이 1만 피오리노(1 fiorino는 순금 3.56그램에 해당됨)가 넘는 사람이 86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반 제조업이나 상업 활동뿐 아니라 대금업에도 종사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당시 피렌체에서 이루어지던 자본가와 상인/제조업자 사이에 이루어졌던 이윤 공유 방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요한 사업자금의 3분의 2 또는 4분의 3을 자본가/대금업자가 투자하고, 나머지를 상인/제조업자가 대되, 발생하는 이윤은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에 따르면, 돈을 빌려주는 측이 결과적으로 이자를 받게 되는 셈이지만, 돈을 빌린 측과 위험의 공유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이는 중세 교회법의 예외적 이자 허용조항에 해당되었고 따라서 불법 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근대가 시작되는 16세기에 들어서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등에서 해상무역을 동반한 상업과 제조업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런데 크고 작은 여러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와는 달리 통일된 국가를 가지고 있던 이들 지역에서는 이자와 대금업의 합법화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자를 상업 활동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하는 시각들이 나타나고, 이자를 종교적 윤리가 아닌 경제적 효용성의 측면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아직도 이자는 신학과 윤리학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더구나 규제되지 않은 고리대금이 몰고 올지 모르는 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플랑드르의 화가 캥탱 마시(1464~1530)의 ‘대금업자와 그의 아내’(1514)라는 그림에는 이미 현실이 돼버린 이자와 그것에 대한 경계심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대금업자로 보이는 사람이 진주, 보석, 금화 등을 행여나 계산이 잘못될까 조심스럽게 저울에 달고 있고,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삽화가 그려진 경건한 책을 읽고 있다가 잠시 눈을 돌려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아내가 있다. 언뜻 보면 꽤 호화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대금업자 부부의 일상이 눈에 들어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따로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아내가 읽고 있는 책, 그리고 선악과를 떠올리게 하는 선반 위의 사과도 느낌이 예사롭지 않지만, 이들 부부의 앞에 놓인 볼록거울에는 십자가 형상을 한 창틀과 교회의 종탑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자의 사회적 이미지가 꽤나 복합적이었음을 그림이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영국 의회의 이자 관련 입법 과정을 일별해보면, 근대초기 유럽에서 이자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합법화가 되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다. 원래는 교회법의 관할이었던 이자가 영국에서 세속법의 통제에 들어온 것은 15세기말이었다. 1487년 영국 의회가 대출금에 이자를 부과하는 행위를 국왕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위반자는 몰수, 벌금, 투옥 등의 처벌을 받게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법률적인 구비요건을 온전히 갖춘 영국 최초의 이자규제법은 1545년 제정된 반(反) 악덕대출법이었다. 이 법이 가진 더 큰 역사적 의미는 최고 10 퍼센트까지의 이자를 허용하되, 그 이상의 대출이자를 부과한 경우에는 원금의 세 배를 몰수하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이는 당시 음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경제적 관행을 현실화 하는 동시에 고리대금에 대한 국가 통제의 억지력을 높이려고 하는 의도에서 제정되었을 것이다. 이 법의 제정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법안이 상원에 상정 되었을 때 주교 1인과 세속 귀족 3인만이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고 하원의 토의과정에서는 어떠한 반대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어떻게 이자가 이렇게 쉽게 합법화 될 수 있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영국 경제가 모직물 산업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7년 뒤인 1552년, 영국 의회는 악덕대출(이자가 있는 모든 대출)은 ‘가장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죄악’이라고 비난하면서 금리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형태의 이자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적발될 경우 원금과 이자를 모두 몰수하도록 했고, 심지어는 관습적으로 허용되어 왔던 고아원 운영 등, 자선 목적의 공익사업에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 엄격한 법률로 인해서 시중에서 유통되는 실제 금리가 오히려 높아지는 부작용이 나온 것이다. 대금업자가 적발 시의 위험부담까지 차입자에게 부담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런던에서는 신용이 좋은 부유층 상인들이 융통할 수 있었던 금리가 20 퍼센트 수준이었고, 젠틀맨 계층을 비롯한 그 밖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30~50 퍼센트의 금리에다 추가적으로 5 퍼센트의 중개 수수료를 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시장의 현실과 이자에 대한 종교적, 윤리적 거부감이 팽팽한 전선을 이어나갔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인 1563년 의회에서 10 퍼센트 이하의 이자를 합법화하자는 법안이 상정되었지만 의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통과되지 못한 것이 그 예이다. 하원에서의 투표결과는 찬성 90, 반대 134표였다. 상원에서는 3차 독회를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시장을 끝까지 이길 수 있는 정부는 없다고 했던가. 1571년 영국 의회에 제출된 반 악덕대출법안의 운명은 달랐다.

의원들의 의견은 30 퍼센트를 넘는 고리대금의 폐해를 줄여야 한다는 데에는 한 목소리였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완전금지와 제한적 허용으로 갈렸다. 제한적으로 이자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원들은 ‘세속정부의 기능은 신의 법을 집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주신 형평과 효용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신민들의 복리를 향상시키는 정책을 집행하는 데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일부 의원들은 이자가 ‘돈의 소유자’와 돈은 없지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자’를 연결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이는 형평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대출자와 차입자,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생활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하는 탐욕을 법률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며, 법은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1571년 영국 의회가 최종적으로 통과시킨 반 악덕대출법은 대타협의 결과였다. 이 법은 원칙론을 받아들여 이자가 수반되는 모든 대출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다만, 금리 10 퍼센트를 기준으로 처벌 강도를 확연하게 차별화함으로써 ‘사실상’ 10 퍼센트 이하의 이자를 허용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새 법은 10 퍼센트가 넘는 금리를 악질적 범죄(heinous usury)로 규정하여, 적발되는 경우 원금의 세 배를 몰수했다. 더구나 이 경우의 대출계약을 원천적으로 무효화함으로써 차입자가 부당한 고금리에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이에 반해 10 퍼센트 이하의 금리는 경미한 범죄(petty usury)로 규정하고, 위반 시에는 원금을 몰수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 영국 정부가 10 퍼센트 미만의 이자를 범죄로 소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자가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사진=허구생 교수)  

글쓴이 허구생 교수는 서강대 졸업 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영국 빈민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수료 후 현재 단국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 '근대 초기의 영국' 등이 있습니다.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이 작성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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