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禮讚
가을 禮讚
  • 전병호 기자
  • 승인 2019.11.29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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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문 경영학 박사 前 우리은행 지점장
나병문 경영학 박사 前 우리은행 지점장

(서울=파이낸셜리더스) 전병호 기자 =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가을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찾아온 가을이 더 반갑다. 쪽빛 하늘과 붉게 물든 가을 산이 만나서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신이 빚어낸 걸작이다. 계절마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은 행운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온갖 곡식과 과일로 넘쳐난다. 어느 때보다도 풍성하다. 땀 흘린 날들에 대한 자연의 보상이다. 늦은 오후에 널찍한 황금빛 들녘을 바라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멀리서 흥겨운 풍년가가 들려오는 듯하다. 쌀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모든게 귀했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에 모처럼 고향에 갈 기회가 있었다. 쇠락한 집터 뒤뜰에 우람한 감나무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가지마다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햇볕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만 마을을 지키는 요즘엔 다 따지도 못하는 감이다. 어릴 적 미처 익지 않은 걸 따 먹고 배탈을 앓았던 기억이 있다. 배고팠던 그 시절엔 감이든 밤이든 나무에 남겨둘 겨를이 없었다. 끼니때마다 밥 대신 먹던 고구마를 성년이 된 후엔 오랫동안 멀리했었다. 구황작물이었던 고구마가 지금은 쌀보다 비싼 건강식품이 되었다. 세월이 변하면 사물의 가치도 달라지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인생의 가을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수확해야 할 때다. 흔히 몸과 마음의 건강, 가족과 친구, 부와 명예 등을 말한다. 그중 어느 것을 이루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나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 일군 것들을 바탕으로 남아있는 삶을 가꾸어가고 싶다.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하다는 생각은 부질없다. 하루하루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가을은 추억을 부른다.

가을은 지난날의 사연들을 불러오는 回想의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누구에게나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수십 년 전에 떠나간 사람이 불현듯 생각난다. 어제까지 같이 웃고 밥 먹던 사람이 보고 싶어진다. 그리움의 크기와 세월의 길이는 비례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리움을 간직한다. 장롱 맨 아래 서랍에서 오래된 편지를 꺼내본다. 빛바랜 봉투 안에는 열정 넘치는 고백이 담겨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체로 제법 길게 쓴 편지다.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살아온다. 예닐곱 살 때는 또래들과 떼를 지어 온 동네를 휩쓸고 다녔다. 조무래기 머리 위를 엄청나게 큰 보름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뒷동산엔 키 작은 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쯤 제법 어른티를 내고 있겠지. 옆집에 눈망울이 유달리 맑았던 누나가 살고 있었다. 그 소녀가 좋아했던 ‘고향의 봄’ 노랫소리가 눈 감으면 지금도 들릴 것 같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 소중한 줄 몰랐던 것들을 떠올리는 횟수가 유독 많아지는 계절이다. 지금은 같이 할 수 없기에 그렇다. 깊어지는 그리움 속에 가을이 흘러간다.

가을은 省察의 계절이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비로소 대상을 사려 깊게 바라본다. 먼 길을 지나온 나그네처럼 삶의 깊이를 음미하기 시작한다. 지나간 길을 돌아보며 사색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숙고한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진다. 그렇게 점점 속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 인생은 멀리 가는 여행길이다. 일이 잘 풀릴 때 겸허함을 잃지 말자. 힘들다고 절망하지 말자. 거친 파도도 평온한 바다도 변하기 마련이다. 조금씩 공들여 완성해가는 삶이 아름답다.

가을은 단풍과 꽃의 饗宴이다.

설악산을 출발한 단풍 행렬이 한동안 북한산에 머문다. 속리산을 거쳐 내장산에 도달하면 마침내 화려함의 절정을 이룬다. 짙게 화장한 단풍나무들이 산 전체를 온통 붉게 물들인다. 비길 데 없이 찬란한 그 장관을 제대로 표현할 시인을 알지 못하고, 제대로 그려낼 화가를 찾을 길 없다. 가을이 깃든 자연은 이토록 우리를 놀라게 한다.

꽃들도 계절을 찬미한다. 구절초인지 쑥부쟁이인지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수줍어하며 들길을 산책한다. 등산로 입구 가까이에 제법 큰 화원이 하나 있다. 산길을 오르려면 그곳의 국화무리 옆을 지나가야 한다. 수천 송이의 꽃들이 제각기 고유한 향을 발산한다. 맡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그윽한 향기다. 산꼭대기에 도달할 때까지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으로 가는 길에서 올망졸망 모여 있는 코스모스 군락을 본다. 이번 가을에도 여전히 가냘픈 몸을 살랑이며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초가을부터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온갖 종류의 꽃들이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는 잔치는 멈출 줄을 모른다.

수확과 추억, 성찰과 향연을 품은 가을은 다른 계절을 압도한다. 가을 한가운데 서서, 봄을 기억하고 여름을 돌아보며 겨울을 기다린다. 지나간 삶을 관조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미래를 상상하며 삶의 의욕을 새롭게 지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 날씨처럼, 지나치지 않은 열정과 식지 않은 호기심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가을엔 쓸쓸함과 외로움조차 아름답다. 그래서 이 가을이 좋다.

(글쓴이 = 나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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